‹ 목록으로 짝꿍이 전교 왕자라니

3화

나는, 종례 시간, 담임선생님이 무심하게 던진 말 한마디에 교실 전체가 순간 얼어붙었다. "김도윤, 서하늘. 이번 학기 학급 임원, 너희 둘로 정해졌으니까 알아둬라." 선생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서류를 정리하며 덧붙였는데, 그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던 걸 보면, 나는 그 순간 이미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교실 뒤쪽에서 낮은 탄식과 웅성거림이 동시에 터져 나왔고, 나는 그 시선들의 무게에 등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고, 누군가는 짝꿍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렸는데, 그 모든 소음 아닌 소음이 나를 향해 쏟아지는 것 같아서 나는 애꿏은 볼펜만 만지작거렸다. "왜, 왜 저 애랑 같이……" 누군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나는 못 들은 척했다. 못 들은 척하는 게 이럴 때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걸,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서하늘은 별 반응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나갔고, 나 역시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나갔다. 발걸음을 옮기는 짧은 순간에도 수십 개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게 느껴져서, 나는 괜히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도 서두르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걸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가 손을 내밀며 담담하게 말했을 때, 나는 그 손을 잡으면서도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손을 맞잡는 그 짧은 접촉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던 건, 아마 교실 전체가 그 순간만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복도에서 팬클럽 아이들 몇 명에게 붙잡혔다. "임원까지 같이 하게 됐네." 여학생 하나가 팔짱을 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그 시선에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압박감이 배어 있었다. 그 애의 눈동자가 나를 훑어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는 그냥 하늘 언니가 걱정돼서 그래." 다른 여학생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걱정이라는 말과 그 애들의 눈빛이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굳이 그 틈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언니가 누구랑 있든 상관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헤아리기도 전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도 등 뒤에서 따라붙는 시선이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다음 날부터 임원 업무로 서하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학급 게시판을 정리하거나 물품을 나르는 사소한 일들이었는데, 그 시간이 쌓일수록 그녀에 대한 인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나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반 아이들 모두가 떠받드는 '왕자님'이라는 이미지가 앞섰는데, 막상 옆에서 함께 물건을 나르고 서류를 정리하다 보니 그녀의 손끝이 생각보다 야무지고, 말수는 적지만 필요한 순간엔 정확히 짚어 말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 생각보다 손이 야무지네." 서하늘이 게시판에 압정을 꽂는 내 손을 보며 무심하게 던진 말에, 나는 괜히 뒷목이 붉어지는 걸 숨기려 애썼다. 별것 아닌 칭찬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흔들릴 일인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압정만 세게 눌렀다. "그냥 하는 거야." 나는 애써 무덤덤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그 말 한마디에 기분이 조금 들뜨고 있었다. 한심했다. 이런 사소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나 자신조차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임원 회의를 마치고 늦게 남은 어느 날, 텅 빈 교실에서 그녀와 단둘이 마주 앉아 있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표정에서 왕자다운 무뚝뚝함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발견했다. 창밖으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책상 위에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그 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스칠 때마다 평소와는 다른 얼굴처럼 보였다. "가끔은, 그냥 나로 봐줬으면 좋겠어." 서하늘이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는데, 그 말에 담긴 쓸쓸함이 내 가슴을 이상하게 건드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내가 그렇게 느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왕자 말고, 그냥 서하늘로." 그녀가 덧붙인 말에,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창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만 교실 안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그 정적이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편안하다고 느꼈다. "넌 나한테 여자로 안 보여?" 그녀가 문득 던진 질문에, 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다. 질문 자체는 짧았는데, 그 짧은 문장이 귓가에 남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울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런 질문이 나를 이렇게 흔드는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왕자로 불리는 걸 즐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반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보여, 여자로." 나는 결국 솔직하게 말했고, 그녀는 잠시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옅게 웃었다. 그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스치는 놀람과 그 뒤를 따라오는 웃음의 온도 차가, 나로 하여금 뭔가 되돌릴 수 없는 말을 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 웃음이 평소의 시원시원한 왕자의 웃음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져서, 나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창밖의 나뭇잎 그림자가 책상 위에서 흔들리는 걸 괜히 눈으로 좇으며, 나는 방금 내가 뱉은 말의 무게를 뒤늦게 가늠해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서하늘은 조금씩 나에게만 다른 말투를 쓰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 앞에서는 여전히 낮고 무뚝뚝한 톤을 유지했지만, 나와 있을 때는 종종 조사가 부드러워지고 어미가 풀어지는 순간들이 생겼다. 예를 들면 "이거 좀 옮겨줄래?"라던 말투가 어느 날부터는 "이거, 옮겨줄 수 있어?"로 바뀌어 있었는데, 그 미묘한 차이를 눈치챈 게 나 혼자만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서 나는 매번 속으로만 그 변화를 곱씹었다. 같이 물품 보관실에서 상자를 나르던 어느 오후에는, 그녀가 무거운 상자를 대신 들어주며 "너, 이런 거 잘 못하잖아"라고 짧게 웃었는데, 그 웃음 끝에 남는 여운이 예전보다 훨씬 오래갔다. 나는 그런 순간들이 쌓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씩 물러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변화를 눈치챈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다는 걸,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팬클럽 아이들의 시선이 이제는 단순한 질투를 넘어, 명백한 적의로 바뀌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 애들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고, 나는 그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뭔가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예감이, 그날 이후로 자꾸만 내 발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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