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입학식 날 아침까지도 은하고등학교가 남녀공학으로 전환된다는 소식이 그저 소문에 불과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중학교 3년 내내 남중, 남고 진학이 당연했던 동네였고, 재작년까지 순수 남고였던 이 학교가 갑자기 여학생을 받는다는 공고가 나왔을 때도 나는 그게 어느 정도는 형식적인 절차일 거라 여겼다. 교문 앞에 붙은 현수막을 보고도, 교무실 게시판에 붙은 공고문을 보고도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실제로 오는 여학생은 몇 명 안 될 거라고, 그냥 정원 채우기 식으로 몇 자리 형식만 갖춰놓을 거라고 나는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강당에 들어서서 신입생들을 마주한 순간, 그 예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한 반에 여학생이 절반, 남학생이 절반이었다. 강당을 가득 채운 교복 색이 절반은 다르게 보였고, 여기저기서 낯선 향수 냄새와 낮은 웅성거림이 뒤섞여 들려왔다. 이런 숫자를 실제로 마주하는 게 얼마나 비현실적인 일인지, 나는 강당 뒤쪽에 서서 새삼 실감했다. 3년 내내 남자 얼굴만 보고 살았던 나에게, 그 광경은 마치 다른 학교에 잘못 들어온 것 같은 이질감을 주었다.
주변 남자애들의 눈빛에는 이미 흥분과 기대가 뒤섞여 번쩍이고 있었다. "이야, 실화냐." "야, 우리 인생 폈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겹쳐 들렸고,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걸 부끄럽지만 인정해야겠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풋풋한 남녀공학 로맨스가 나에게도 찾아올지 모른다는 근거 없는 낙관, 그것이 그날 아침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심했다고, 지금 와서 생각하면.
반 배정표를 확인하러 게시판 앞에 몰려든 아이들 틈에서 나는 발끝을 세워가며 명단을 훑었다. 사람들 어깨 사이로 겨우 시선을 밀어 넣어 내 이름과 반 번호를 찾아냈을 때만 해도 나는 여전히 들떠 있었다. 1학년 3반, 출석번호 17번, 김도윤.
"야, 저기 저 여자애 봤어? 완전 예쁘다." 옆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짧은 다크브라운 머리를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각진 턱선과 곧은 눈썹, 큰 키 때문에 멀리서 보면 남학생으로 오해할 법한 인상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끌렸다. 다른 여학생들이 대체로 교복 치마 밑으로 다리를 모으고 서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는 것과 달리, 그 애는 팔짱을 낀 채 무심한 표정으로 게시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 소란스러운 강당의 공기가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저 애도 3반이야." 누군가의 말에 나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뭔가가 어긋난 기분이 들었다.
교실에 들어가서 자리를 찾을 때, 나는 창가 두 번째 줄, 그 여학생의 옆자리가 내 자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자리에 놓인 이름표를 확인하는 손끝이 미묘하게 굳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애써 태연한 척 걸어가 앉았다.
짝지 이름표를 확인하니 서하늘, 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녕." 그녀가 먼저 짧게 인사를 건넸고,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뭔가 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정작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해서, 여학생답다고 하기엔 어딘가 무뚝뚝한 느낌이 있었다. 남학생들 사이에서 흔히 듣던 그런 억양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흔히 상상하던 여학생의 말투와도 달랐다. 어딘가 붙잡을 데가 없는 목소리였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교실 뒤쪽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몇몇 여학생들이 나를 향해 던지는 눈빛이 곱지 않다는 걸, 나는 그때까지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새 학교,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다들 서로를 관찰하고 있으려니, 하고 넘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안일한 착각이었는지.
쉬는 시간이 되자 상황은 더 분명해졌다. 서하늘의 자리 주변으로 여학생 몇이 모여들었는데, 그 시선들이 하나같이 나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한 명은 팔을 뻗어 서하늘의 어깨를 툭 치며 뭔가 소곤거렸고, 그 짧은 대화 도중에도 눈은 계속 내 쪽을 향해 있었다.
"쟤가 하늘 언니 짝이야?"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언니'라는 호칭이 이상하게 걸렸지만 그때는 그냥 넘겼다. 같은 학년인데 왜 언니라고 부르는 건지 의아하긴 했지만, 별거 아닌 애들 말버릇이겠거니 했다.
점심시간, 급식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한 여학생이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조심해, 걔 옆자리." 그녀의 눈빛에는 경고와 질투가 뒤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을 때는 이미 그 여학생은 무리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나는 그저 멍하니 서서, 방금 들은 말을 몇 번이고 되짚어봤다. 조심하라니, 대체 뭘.
서하늘은 그런 시선들에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나에게 급식판을 놓을 자리를 비켜주며 짧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은 특별히 다정하다거나 애교스러운 종류가 아니었다. 그냥 담백하게, 아 여기 앉으라고, 하는 식의 무심한 웃음이었는데도 왠지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 웃음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는 걸, 나는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까지 곱씹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면서도 낮에 있었던 장면들이 자꾸 떠올랐다. 각진 턱선, 무심한 표정, 짧게 끄덕이던 인사, 급식판을 놓을 때 살짝 비켜주던 손짓까지. 별것도 아닌 것들이 왜 이렇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다.
한심했다, 첫날부터 이렇게 마음을 빼앗기는 내 모습이. 남녀공학이 되면 로맨스가 시작될 거라 기대했던 나였지만, 정작 벌어진 건 로맨스와는 거리가 먼 종류의 시선들, 즉 질시와 경계였다는 걸 나는 아직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그 여학생들의 눈빛이 왜 그렇게 날카로웠는지, '언니'라는 호칭이 왜 나왔는지, '조심하라'는 경고가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서하늘의 웃음 하나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내 신발장 안에서 발견한 쪽지 한 장이, 그 이해의 시작이 될 참이었다.
접힌 모양이 유난히 각진 그 쪽지를 손끝으로 집어드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뛴다고만 느꼈다. 종이를 펼치는 손끝이 어쩐지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