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믿지 않기로 했었는데

5화

도서실 창가 자리에 앉은 은재는 이번 조별과제 자료를 정리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손끝은 리듬감 있게 움직였다. 나는 방금 있었던 강민재와의 대화를 굳이 꺼내지 않았다. 딱히 중요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내가 느꼈던 그 묘한 불편함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불편함?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은재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도서실 특유의 종이 냄새와 오래된 책등이 뒤섞인 공기가 익숙하게 코끝을 스쳤다. 이 자리는 어느새 내게도 편안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조별과제 발표는 다음 주 목요일이래요." 은재가 노트북 화면을 내게 돌리며 말했다. "저희 파트는 거의 다 됐고, 도현 씨 쪽 분량만 조금 더 채우면 될 것 같아요." "…네." 나는 자리에 앉으며 짧게 답했다.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나를 다그치지 않았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부분을 부드럽게 짚어줄 뿐이었다. 처음엔 그 배려가 어딘가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부담스러움이 오히려 편안함으로 바뀌어 있다는 걸 느꼈다. 타협점? 이런 관계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나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학교에서는 조별과제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척을 해야 했다. 그 이중적인 거리감이 가끔은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처럼 도서실 마주 앉아 자료를 정리하는 순간에는, 우리가 정말 남들 눈에는 그저 같은 조원일 뿐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저기, 도현 씨." 은재가 노트북을 덮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늘 강민재 학생이 저 찾아왔었죠."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아세요?" 나는 되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흔들린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 학생이 도서실 앞에서 저 기다리다가, 도현 씨랑 마주쳤다고 저한테 직접 말했거든요." 은재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눈매가 살짝 아래로 처지는 그 표정을 나는 이미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뭔가를 조심스럽게 물어보려 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제가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뭘요." "그 학생이 도현 씨한테 뭐라고 했는지, 궁금해서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걸 말해도 되나, 아니면 그냥 넘어가야 하나. 은재의 손끝이 노트북 모서리를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두드림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 같았다. "그냥 도서실 자주 오냐고 물었어요." 나는 사실을 축소해서 말했다. 은재의 미간에 잔물결이 스쳤다. 뭔가를 짐작하는 표정이었다. "…그렇군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다만 노트북을 다시 열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 발표 결과, 축하한다는 말 아직 못 했네요." "딱히 축하받을 일은." "학년 5위인데요. 특진반 애들이 다 놀랐다던데." "…그런가 보네." "윤성민 학생이 좀 힘들어했다고 들었어요." 은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녀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내 쪽으로 눈을 맞췄다. "그 사람, 원래 압박이 많은 자리에 있었거든요. 특진반은 성적이 조금만 흔들려도 부모님들 전화가 온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나는 윤성민이라는 인물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저 나를 견제하는 경쟁자로만 봤는데, 그의 자리에도 나름의 무게가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이다. 성적표 하나에 걸린 게 그리 많다면, 나 같은 존재가 갑자기 끼어든 게 얼마나 위협적으로 느껴졌을까. 그래도 그게 나를 노려볼 이유는 안 되잖아. 은재는 그 이상 윤성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자료 화면을 스크롤하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을 짚어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내 몫의 자료로 눈을 돌렸다. * 방과 후, 나는 준호와 함께 급식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태윤이는 농구부 훈련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고, 우리 둘만 남아 늦은 오후의 햇살을 쬐고 있었다. 벤치 옆 화단에서는 늦게 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저 멀리서 농구공이 바닥을 튕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야, 근데 진짜 강민재 걔 은재한테 관심 있는 거 아니냐?" 준호가 대뜸 물었다. "…몰라." 나는 무심하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그 말이 걸렸다. "딱 보니까 관심 있는 거 같은데. 근데 왜 너한테 말을 걸었을까?" "…나도 몰라." 무슨 소리지? 강민재는 왜 나를 통해 은재에게 다가가려 했을까.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와 은재가 같은 집에서 지낸다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조별과제 파트너라는 사실은 이미 반 아이들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나를 통해 은재의 근황을 캐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 걘 원래 그런 애야?" 나는 물었다. "강민재? 조용하고 좀 소심한 편인데, 은재한테는 좀 다르게 굴더라고. 도서위원회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은재 자리 근처에서 얼쩡거렸다는 말도 있었어." 준호가 손으로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야,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표정." "딱 신경 쓰인다는 표정인데." "아니야." 나는 부정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빨랐다. 뭔가 마음이 불편했다. 이게 질투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나는 그 감정을 애써 부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다리에 힘이 살짝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별거 아닌 감정에 이렇게 흔들리는 게 스스로도 낯설었다. "어디 가?" 준호가 물었다. "집에." "은재네 집?" 준호가 씩 웃으며 되물었다. "…그냥 집." 나는 대답을 피했지만, 준호의 웃음은 더 커졌다. "야, 두 달째 살면서 그게 그냥 집이 아니면 뭐냐." "그건 그냥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고." "사정, 사정. 그 사정 나도 좀 알고 싶은데."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교문을 나서는 길, 저녁 바람이 제법 차갑게 목덜미를 스쳤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등굣길에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준호가 급하게 뛰어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의 이마에는 땀이 살짝 배어 있었는데, 급하게 뛰어온 걸음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났다. "야, 성민이 걔가 재대결 신청했대." "…재대결?" "다음 실력고사에서 자기가 확실하게 1위 하고, 너랑 순위 격차 확실히 벌리겠다고 특진반 게시판에 대놓고 써놨다더라."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용히 지내려던 계획이 또 한 번 흔들리는 걸 느꼈다. "게시판에? 그런 걸 왜 굳이 공개적으로." "몰라, 나도 그게 이상하더라. 그냥 조용히 공부해서 이기면 될걸, 왜 저렇게 대놓고 선언까지 하는지."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저 순위 하나 때문에? 특진반이라는 자리가 그에게 얼마나 큰 압박인지는 어제 은재에게 들어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압박이, 굳이 게시판에 공개적으로 선언까지 해야 할 만큼 절박한 것이었을까. 나는 그 물음에 명확한 답을 낼 수 없었다. "너 그럼 어떻게 할 거야? 받아줄 거야?" "…받아주고 안 받아주고 할 문제가 아니잖아. 시험은 어차피 다 같이 보는 거니까." "그렇긴 한데. 근데 성민이 표정 진짜 심각했다더라. 무슨 각오한 사람처럼."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이 재대결이 단순한 성적 경쟁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그날 아침 나를 떠나지 않았다. 등굣길 내내, 교실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 불안감은 마치 아침 공기 속에 섞인 냉기처럼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