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종례가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녀석은 궁금한 걸 하루도 못 참는 성격이라, 은재가 왜 손을 들었는지부터 캐물으러 갈 게 분명했다. 나는 굳이 따라가지 않고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필통을 집어넣고 교과서를 순서대로 정리하는 그 짧은 사이, 옆자리에 누군가 털썩 앉는 소리가 났다.
태윤이었다.
"너 오늘 급식 뭐 나오는지 알아?"
"몰라."
"카레래. 너 카레 좋아해?"
"…딱히."
"딱히라는 대답 진짜 자주 하는구나."
그 말에 나는 뭐라고 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가방끈을 고쳐 맸다. 딱히, 라는 말이 내 입버릇이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그런 걸 정확히 말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좋고 싫음을 드러내는 순간 누군가 그걸 파고들 것 같은 기분이 늘 있었으니까.
태윤은 내 침묵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창밖을 보며 딴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편했다.
돌아온 준호는 뭔가 흥미로운 정보를 가져온 얼굴이었다. 눈이 반짝거리는 게, 딱 저럴 때는 남 얘기를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표정이었다.
"서은재, 다음 조별과제 조 편성표에 오류 있는 거 짚은 거였대. 담임이 자기 이름을 두 번 넣었다고."
"그런 걸 왜 굳이 말하냐."
"그러니까 대단하잖아. 남 일에도 저렇게 꼼꼼하다니. 자기 이름 두 개 있으면 그냥 조 하나 더 골탕 먹여도 될 텐데, 그걸 굳이 손 들고 고쳐달라고 하냐."
"할 말이 있으면 하는 거지."
"넌 뭐 그렇게 걔 편을 드냐."
편을 든 게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준호는 그마저도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별생각 없이 창밖을 봤는데, 마침 은재가 복도를 지나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걸음걸이가 유난히 조용했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시선이 따라붙는데도 그 애는 그런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시선이라는 게 원래부터 자기 것이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앞만 보고 걸었다.
그 무심함이 부럽기도 하고, 조금은 이상하기도 했다.
급식실에서는 준호와 태윤이 늘 그렇듯 앉는 자리에 나도 자연스럽게 끼어 앉았다. 처음 몇 번은 그 자리가 낯설어서 밥을 먹는 내내 어색했는데, 지금은 그 어색함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걸 나조차 느낄 수 있었다. 식판에 카레를 받아 들며 태윤이 옆구리를 툭 쳤다.
"봐, 카레 맞다니까."
"…그러네."
"야, 너 이번 조별과제 조 어디야?"
태윤이 물었고, 나는 종이를 꺼내 확인하다가 순간 멈췄다.
조 편성표 세 번째 줄, 내 이름 옆에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은재.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준호가 내 종이를 뺏어 보더니 낮게 웃었다. "오, 대박. 전교 1위랑 같은 조네."
"…그런가 보네."
"부럽다, 인마."
나는 부럽다는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부러울 일인지 아닌지, 그때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냥 낯선 이름이 내 이름 옆에 나란히 적혀 있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조별과제 첫 모임은 방과 후 도서실에서 열렸다. 창밖으로 해가 벌써 낮게 걸려 있었고, 도서실 안은 조용한 종이 냄새와 오래된 나무 책상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다른 조원 두 명과 함께 늦게 도착했는데, 은재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고, 펼쳐진 노트에는 색깔별로 정리된 메모가 줄지어 있었다.
가까이 앉게 되자 아마빛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향이 났고, 나는 괜히 시선을 피하며 노트를 펼쳤다.
"이도현 학생이죠?" 은재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저는 서은재예요. 잘 부탁드려요."
존댓말로 건네는 인사가 지나치게 정중해서, 나는 오히려 그게 낯설었다. 같은 반이면서도 존댓말을 쓰는 애는 드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
과제는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었다. 은재가 미리 정리해 온 자료 덕분에 방향이 금방 잡혔고, 나머지 조원들도 각자 맡은 부분을 나눠 가지며 속도가 났다. 그런데 자료 조사를 맡은 다른 조원이 갑자기 자기 자료를 흘려서 바닥에 쏟는 사고가 났다. 종이 여러 장이 책상 아래로, 의자 밑으로 사방에 흩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흩어진 종이를 주웠는데, 그중 한 장이 은재의 발밑까지 굴러갔다. 그 애가 몸을 숙이는 것과 내가 손을 뻗는 것이 거의 동시였고, 손끝이 살짝 스쳤다.
"아." 은재가 짧게 숨을 삼켰고, 나는 재빨리 손을 뺐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별일 아닌데도 그 순간의 정적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종이 한 장 때문에 스친 손끝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나무라며 남은 종이를 주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은재는 별다른 말 없이 다시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지만, 그 애의 시선이 잠깐 내 쪽으로 왔다가 다시 노트로 돌아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모임이 끝날 무렵, 은재는 조원들에게 각자 맡을 부분을 정리해 나눠주며 마지막으로 나를 보고 말했다.
"자료 관련해서 궁금한 거 있으면 편하게 연락 주세요."
"…네."
편하게, 라는 말이 나한테는 유독 낯설게 들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 짧은 접촉을 계속 생각하다가 스스로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별일도 아닌데. 손끝이 스친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계속 곱씹고 있는지, 나 자신도 이해가 안 갔다.
그런데 별일이 아닌 게 아니었던 건, 집에 도착한 뒤였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발밑이 축축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바닥 전체가 물에 젖어 있었고, 화장실 쪽에서 뭔가 흐르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숨을 삼켰다. 천장 배관이 터져 물이 쏟아지고 있었고, 이미 방 안 절반은 물이 차 있었다. 물줄기가 천장에서 곧게 떨어지며 바닥에 자잘한 물방울을 튀기는 소리가 방 전체에 울렸다.
"뭐야, 이게."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급하게 수도를 잠그러 갔지만, 밸브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한참을 헤맸다. 신발장 옆, 세탁기 뒤, 심지어 현관 밖 계단까지 나가 봤지만 어디에도 밸브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관리실에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최악이었다.
"배관 공사가 크게 필요해서요, 이 방은 최소 며칠은 사람이 못 지내실 거예요."
"…며칠이요?"
"짧게는 삼 일, 길면 일주일 넘어갈 수도 있고요."
나는 전화를 끊고 물에 잠긴 방 한가운데 서서, 오늘 밤 당장 어디서 자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을 실감했다. 발밑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현실감이 더 또렷해졌다.
부모님은 지방에 계셨고, 당장 올라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준호네 집은 이미 동생들로 가득 차 있다고 들었고, 태윤은 기숙사에 준하는 부실에서 지내니 나를 재울 자리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아는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봐도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었다. 나는 물이 흥건한 신발을 신은 채 계단을 내려가며, 처음으로 이 낯선 도시에서 진짜 혼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휴대폰이 울린 건 그때였다. 낯선 번호였다. 조별과제 단체 채팅방에 아까 나눴던 번호 중 하나였고, 화면에는 서은재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이도현 학생, 늦게 죄송한데요. 아까 자료 하나 빠진 게 있어서요."
나는 물에 잠긴 방을 등지고 서서, 뭐라고 답장을 보낼지 잠깐 고민했다. 계단 아래로 젖은 신발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손에는 여전히 휴대폰 화면의 빛이 차갑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이, 생각보다 훨씬 긴 밤으로 이어질 거라는 건 그때까지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