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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배관 공사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처음엔 삼 일이라던 말이 일주일이 되었고, 일주일이 다시 이 주가 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도 정확한 완공일을 말해주지 않았다. 공사 업체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관리소장은 매번 "조금만 더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렇게 서은재의 집 손님방에서 지낸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하루하루가 조심스러웠다. 발소리도 낮추었고, 화장실 쓰는 시간도 최대한 짧게 줄였으며, 은재가 잠든 새벽에는 냉장고 문조차 열지 않으려 애썼다. 이불을 갤 때도 각을 맞췄고, 손님방 문은 항상 반쯤 열어두어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은재가 알 수 있게 했다. 남의 집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감각이 뼈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서서히 그 집의 리듬에 스며들고 있었다. 은재가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어나 된장국을 끓이는 소리에 눈을 뜨고,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그 짧은 시간이 어느새 하루의 시작으로 자리 잡았다는 걸,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은재가 늦잠을 잔 탓에 된장국 냄새가 나지 않자, 뭔가 잘못된 것처럼 마음이 붕 뜨는 기분마저 들었다. 낯설다. 이런 낯섦은 처음이었다. 오늘은 실력고사 결과발표일이었다. 등교 준비를 하는 내 손끝이 평소보다 조금 더 무거웠다. 넥타이를 매는 손이 자꾸 삐뚤어졌고, 신발을 신으면서도 신발끈을 두 번이나 다시 묶었다. 예전 학교였다면 성적표는 나를 괴롭히는 이유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잘하면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고, 못하면 그것도 트집이었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마다 나는 교실 뒤편에 앉아 최대한 존재감을 지우려 애썼고, 그래도 늘 누군가의 입방아에 올랐다. 이번 생에는 절대로 눈에 띄지 않으려 했고, 이번 생에는 절대로 누군가의 표적이 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지난 실력고사에서 나는 학년 5위를 해버렸고, 특진반 수석이라는 윤성민을 밀어냈다. 계획이 틀어졌다. "도현 씨, 국 다 식어요." 은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마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그녀가 식탁 앞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호박색 눈이 아침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밝게 보였다. 그 색이 유리창을 통과한 빛과 겹쳐 마치 꿀을 녹여 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한 나 자신이 어이없어 숟가락을 꾹 쥐었다. "오늘 발표 있는 날이죠." 그녀가 숟가락을 들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긴장돼요?" "딱히."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긴장하고 있었다. 손바닥에 미세하게 땀이 배어 있었고, 국그릇을 든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말로 꺼내는 순간 뭔가가 더 커질 것 같았고, 나는 그 커지는 것을 막고 싶었다. 은재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국그릇을 내 앞으로 조금 더 밀어주었을 뿐이었다. 그 사소한 배려에 마음 한구석이 데워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숟가락을 들었다. 된장국은 짐작보다 훨씬 뜨거웠고, 그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다녀올게요." 문을 나서며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말했다. "네, 잘하고 와요." 은재의 대답이 등 뒤에서 따라왔다. 그 말이 어쩐지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게시판 앞에 아이들이 몰려 있었고, 몇몇은 나를 힐끔거리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익숙한 시선이었다. 예전 학교에서 겪었던, 등 뒤로 쏟아지던 그 눈빛들과 비슷했다. 그때는 성적이 오르면 재수 없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곧 책상 위에 낙서로, 신발장 속 쓰레기로, 나중엔 더 험한 것들로 이어졌었다. 숨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괜찮아. 여긴 다르다고 했잖아. 준호가 있고, 태윤이가 있잖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숨을 천천히 골랐다. "야, 이도현!" 준호가 어깨를 툭 치며 다가왔다. "너 또 5위래. 이번엔 아예 2위 실질이라던데?" "…그런가 보네." 나는 짧게 답했지만, 속으로는 안도했다. 준호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장난기만 섞여 있을 뿐,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 "어이구, 우리 도현이 또 겸손 떠네." 태윤이 끼어들며 웃었다. "이번엔 성민이 진짜 표정 볼만했다니까. 걘 주수석인데 2등 차이가 20점 넘게 났다고 자랑했었잖아. 근데 우리 도현이가 코앞까지 따라붙었으니." "코앞까지가 아니라 거의 붙은 거 아니냐?" 준호가 게시판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몇 점 차이였지, 3점?" "그쯤 됐어." 태윤이 대답했다. "야, 근데 저 표정 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게시판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윤성민이었다. 그의 표정은 지난번보다 더 굳어 있었다. 입학식 신입생 대표였던 그가, 이제는 특진반의 자존심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늘 여유롭게 웃던 얼굴에는 지금 웃음기 하나 없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뭔가를 재는 듯했다. 그는 나를 잠시 응시하다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왜 저러지? 그냥 무시하는 걸까, 아니면 뭔가를 준비하는 걸까.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자식 저번부터 좀 이상하더라." 준호가 낮게 중얼거렸다. "특진반 애들 사이에서 소문 돈다던데, 걔가 이번 결과 나오면 뭔가 할 거라고." "뭘 해?" 태윤이 물었다. "몰라. 근데 얼굴 보니 그냥 넘어갈 거 같지는 않은데." 불길한 예감이 스쳤지만, 나는 그것을 애써 눌러 담으며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에도, 등 뒤로 여전히 몇몇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무게였다. * 점심시간, 도서실로 향하던 길에 낯익은 얼굴이 나를 가로막았다. 도서위원 강민재였다. 1학년이지만 나보다 키가 크고 안경을 쓴, 어딘가 조심스러운 인상의 학생이었다. 손에는 도서 대출 카드 뭉치를 들고 있었는데, 그걸 쥔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기, 이도현 학생."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나는 그를 경계하며 되물었다. 그가 나를 부를 이유가 없었다. "혹시, 서은재 학생이랑 조별과제 같이 하죠?" 그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그런데요." "그, 도서실에 자주 오는지 아세요? 요즘 안 보이길래." 순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은재를 묻는 게 아니라, 은재를 통해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강민재의 눈빛에는 은재에 대한 궁금함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그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글쎄요." 나는 짧게 잘라 대답했다. 더 이상 캐물을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혹시 요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요? 예전엔 거의 매일 왔었는데." "제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요." 강민재의 표정에 실망이 스쳤다. 그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결국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사라졌다. 대출 카드 뭉치를 쥔 손이 여전히 굳어 있는 채였다. 뭐지, 저 반응은.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나는 그 불편함의 이유를 알 것 같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며 도서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은재가 있었다. 창가 자리, 늘 앉던 그 자리에 볕이 쏟아지고 있었고, 그녀의 아마빛 머리카락이 그 빛을 받아 옅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방금 전 강민재와의 대화에서 느꼈던 불편함이 완전히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바뀌어 있다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건 뭘까. 나는 그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걸음을 옮겨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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