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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같은 날 오후, 한빛고등학교 후문 근처 편의점. 여름 초입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순간마다 안쪽의 냉기와 뒤섞여 묘한 얼룩을 만들어냈고, 도윤이 태준과 함께 방과 후 음료를 사러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코끝에 닿은 것은 냉장고에서 새어 나오는 차가운 바람과 어딘가 들뜬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매대 사이를 지나며 별 생각 없이 음료를 고르던 도윤의 시선이, 창가 테이블 쪽에서 문득 걸음을 멈춘 태준을 따라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거기 앉아 있는 낯선 남학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흐트러짐 없는 셔츠 소매,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괸 자세에서부터 이미 익숙한 시선을 받는 데 길들여진 사람 특유의 여유가 배어 있었는데, 넥타이 색으로 보아 4반 학생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등을 곧게 세운 채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강서린이었다. "저거 누구야." 태준이 음료수 진열대 앞에서 흠칫하며 도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손끝에 힘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태준 역시 뭔가 불편한 기운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도윤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는데, 서린의 표정이 어딘가 굳어 있는 것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어깨가 조금 더 경직되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끝은 미세하게 굽어 있었다. "손재현이잖아, 4반." 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계심은 숨겨지지 않았다. "저 자식 유명해. 미소녀란 미소녀는 다 건드려보려고 한다던데. 지난번엔 다른 여학생한테도 저러다가 소문 나서 한동안 시끄러웠잖아." 도윤은 대답 없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창을 통해 들어온 오후 햇살이 재현의 얼굴 반쪽을 밝히고 있었는데, 그 미소는 분명 다정해 보였지만 어딘가 계산된 온도로 느껴졌다. "과제 좀 도와줄게." 재현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서린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그 손짓은 자연스러웠고 목소리에는 성가심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친절함이 담겨 있었지만, 서린은 팔짱을 낀 채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필요 없어." 서린의 짧고 건조한 대답이 편의점 안 소음을 가르고 도윤이 서 있는 자리까지 또렷하게 닿았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필요 없잖아." 재현이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으며 몸을 살짝 기울였다. 테이블 위로 손을 짚은 그의 상체가 서린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는데, 그 거리감이 부담스러운 듯 서린의 어깨가 미세하게 뒤로 물러났다. "그냥 친해지자는 거야. 나 그렇게 나쁜 놈 아닌데." "친해질 이유 없어." 서린이 짧게 잘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재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별다른 힘이 실린 것도 아닌, 그저 붙잡아 세우려는 정도의 가벼운 손짓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서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도윤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저건.' 도윤의 심장이 순간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어제 골목에서의 장면과 지금이 겹쳐지며 몸이 먼저 움직였다. 손끝이 냉장고 문 손잡이를 놓았고, 발걸음이 생각보다 먼저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기요." 도윤이 걸어가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목소리를 냈다. "음료수 여기 놓고 가려는데, 자리 좀." 도윤은 일부러 상황과 무관한 말을 건네며 재현의 손이 서린의 손목에서 떨어지도록 유도했는데, 재현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손을 놓았다. 그 짜증스러운 표정 속에는 방해받는 것을 익숙지 않아 하는 사람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뭐야, 넌." 재현이 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딱히 위협적인 어조는 아니었지만, 은근한 무시가 섞여 있었다. 자신보다 눈에 띄지 않는 상대라고 판단한 사람의 시선이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요." 도윤이 담담하게 대답하며 서린을 슬쩍 바라보았는데, 서린의 눈빛이 어제와 마찬가지로 서늘하게 굳어 있는 와중에도 어딘가 안도의 기색이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미세한 온도 변화 하나가 도윤에게는 이상하게 선명하게 읽혔다. 재현은 잠시 도윤을 노려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트를 챙기는 손짓 하나에도 여유가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재미가 사라졌다는 태도에 가까웠다. "됐다, 다음에 또 보자." 그가 서린을 향해 마지막 말을 던지고 편의점을 나섰는데, 그 목소리에 담긴 여운이 마치 이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들렸다. 서린은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 그녀의 눈동자는 유리문 너머를 좇고 있었다. "괜찮아?"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안에는 애써 눌러 담은 감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태준이 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도윤 곁으로 다가오며 낮게 속삭였다. "야, 너 요즘 왜 이렇게 히어로 놀이를 하냐." 장난스러운 어투였지만, 그 눈빛에는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태준은 팔짱을 낀 채 도윤을 슬쩍 바라보다가, 다시 서린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고 서린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며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도윤의 눈에 들어왔다. 손목을 감싼 손가락에 유난히 힘이 들어가 있었고, 그 자세는 마치 무언가를 억지로 눌러 잠재우려는 사람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저 애, 단순히 남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구나.' 도윤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손목을 잡힌 순간의 반응은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선, 무언가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온 반사적인 두려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제 골목에서의 일도, 오늘 편의점에서의 일도, 그 밑바탕에는 도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기억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린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또."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제와 같은 건조함이 남아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언가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해 문을 살짝 열어보였다가, 이내 그 틈을 서둘러 닫아버리려는 사람처럼. "별거 아니야." 도윤이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이번에는 그 말이 스스로에게조차 어색하게 들렸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말을 뱉었는데, 오늘의 그 말에는 어제보다 더 무거운 무언가가 얹혀 있었다. 서린은 짧게 목례한 뒤 편의점을 나섰고, 그녀가 사라진 유리문 너머로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었다. 태준이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도윤을 향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근데 저 손재현 말이야, 저렇게 그냥 넘어갈 놈이 아닌데." 태준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저 자식 자존심 상하면 꼭 다시 건드리더라고. 서린이 괜찮을까?" 도윤은 대답하지 못한 채, 재현이 사라진 문 쪽과 서린이 사라진 반대쪽 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손끝에 남은 냉장고의 냉기가 채 가시지 않았는데도, 가슴 속에서는 이상하게 뜨거운 불안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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