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하늬가 내민 휴대폰 화면에는 학교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글이 떠 있었다.
[학생회 우하늬랑 하준이 요즘 계속 같이 다니던데, 둘이 사귀는 거 아님?]
게시글 아래에는 복도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우리 뒷모습이 찍힌 흐릿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교복과 머리 모양만으로도 아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이 요즘 자주 붙어 다니긴 함."
"설마 진짜 사귀는 거?"
"그냥 학생회 일 도와주는 거 아니야?"
댓글은 단순한 목격담과 가벼운 추측뿐이었다. 취재나 벌칙 고백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벌써 학교 안에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이거 언제 올라왔어?"
"방금."
하늬가 휴대폰 화면을 껐다.
"별거 아닐 수도 있어. 그냥 누가 보고 올린 거니까."
그렇게 말했지만, 다음 날 학교에 가자 몇몇 시선이 전보다 오래 우리를 따라붙었다.
학생회실 앞에서 하늬가 서류 박스를 옮기다 넘어질 뻔한 걸 본 게 시작이었다.
박스 모서리가 무릎을 치는 순간, 하늬의 몸이 살짝 기울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는 늘 있는 일이야."
하늬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박스를 다시 쌌다.
그 웃음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늘 있는 일이라니.
그 말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박혔다.
늘 있는 일이면, 늘 힘든 일이라는 뜻 아닌가.
다음 날부터 나는 매일 그 시간에 학생회실 앞을 지나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일부러 그런 거였다.
박스를 옮길 때마다 한쪽을 같이 들었다.
"뭐야, 안 도와줘도 되는데."
"취재 겸."
"이게 무슨 취재."
"성실한 여주인공은 어떻게 힘든 일을 견디는지 관찰 중."
하늬가 피식 웃었다.
웃음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의 그 완벽하게 각도까지 계산된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이 새어 나오는 순간이 점점 늘었다.
박스는 늘 무거웠다.
선생님들 심부름, 축제 준비, 동아리 예산 정리까지.
하늬가 도맡은 일이 많았다.
다들 그게 당연하다는 듯 맡겼다.
"우하늬한테 맡기면 돼."
"우하늬가 잘해."
"우하늬는 원래 이런 거 잘하잖아."
복도를 지날 때마다 그런 말들이 들렸다.
하늬는 그 말들을 다 받아냈다.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넌 왜 이걸 다 혼자 해."
"잘하니까."
"그래서 다들 너한테만 맡기는 거고."
하늬가 잠깐 손을 멈췄다.
서류를 넘기던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멈춰 있었다.
"...맞아."
그 대답이 씁쓸하게 들렸다.
씁쓸한데, 그걸 씁쓸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냥 인정해버리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 김민석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교무실 문을 열자마자 선생님이 손짓으로 자리를 가리켰다.
"하준아, 반 애들이랑 좀 어울려봐. 요즘 좀 나아졌다고 들었는데."
"나아졌다니요."
"우하늬랑 다닌다는 얘기 들었어."
목이 살짝 굳었다.
"...그냥 좀 아는 사이라서요."
"됐고, 다음 주 정보 수업 발표 조 짜였다. 네가 팀장이야."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피할 방법이 없었다.
"저 이런 거 안 하는데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선생님은 이미 다음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반박할 틈도 안 주는 스타일이었다.
교실로 돌아오는 길에 조원 명단을 봤다.
낯선 이름들 사이에서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막막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차라리 혼자 하는 게 편한데.
발표일, 강당에 학년 전체가 모였다.
주제는 자유였다.
대부분 팀이 발표 자료를 파워포인트로 준비했다.
화면마다 색색의 그래프와 사진이 떠 있었다.
평범하고, 안전하고, 예상 가능한 것들.
내 순서가 왔을 때, 나는 노트북을 연결하고 직접 만든 작은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간단한 미니게임이었다.
반 아이들 이름을 넣어서 즉석으로 캐릭터가 움직이는 프로토타입.
화면이 켜지자 강당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와, 이거 뭐야."
"진짜 게임이잖아."
"내 이름 넣어봐, 내 이름."
웅성거림이 커졌다.
평소 나를 신경도 안 쓰던 애들이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봤다.
누군가 손을 들고 자기 이름을 외쳤고, 화면 속 캐릭터가 움직이자 웃음이 터졌다.
발표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이거 몇 시간 걸렸어?"
"코드 어디서 배웠어?"
"다음에 또 만들어줄 수 있어?"
처음으로 교실 안에서 존재감을 느꼈다.
낯설고, 조금 어색했다.
손끝이 살짝 차가웠다.
관심받는 게 이렇게 불편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완전히 싫지는 않았다.
하늬는 맨 뒷자리에서 팔짱을 낀 채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진짜 웃음이었다.
평소 학생회 일을 처리할 때의 사무적인 표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강당의 웅성거림이 잠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발표가 끝나고 복도에서 마주쳤다.
아이들이 다 빠져나간 복도는 조용했다.
"잘했어."
"별거 아니었어."
"별거 아닌 게 애들 다 놀랐잖아."
"넌 매일 놀라운 걸 보여주면서 뭘."
하늬가 걸음을 멈췄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오후 빛이 하늬의 옆얼굴에 걸렸다.
"나는 놀랍지 않아. 다 예상 가능한 거야. 성적, 발표, 대회. 다 계산돼 있어."
"계산이 안 되는 것도 있어야 재밌지 않아?"
하늬가 나를 빤히 봤다.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
그 짧은 침묵 사이에 뭔가가 지나갔다.
말로 옮기기엔 너무 짧고, 그냥 넘기기엔 너무 길었다.
"...넌 재밌는 사람이네."
짧은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다시 재생됐다.
재밌는 사람이라니.
그게 칭찬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는데, 자꾸 웃음이 났다.
그날 이후로 하늬는 조금씩 학생회 일을 나눠 맡기 시작했다.
"이거 네가 해도 돼"라는 말을 처음 해봤다면서.
처음엔 별거 아닌 서류 정리였다.
그다음엔 축제 부스 배정.
그다음엔 예산안 초안까지.
하나씩 넘겨줄 때마다 하늬의 표정에 아주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이러다 나 할 일 다 없어지는 거 아니야?"
"할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나눠 갖는 거지."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대."
"그냥 생각났어."
작은 변화였지만, 완벽한 가면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 균열은 아주 얇고 눈에 잘 안 보이는 선이었다.
하지만 한번 생긴 균열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씩 넓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균열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기분 좋았다.
동시에, 그게 왜 이렇게 기분 좋은지는 스스로도 잘 설명이 안 됐다.
취재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도, 자꾸 그 얼굴을 관찰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취재라는 말도 슬며시 빼먹게 됐다.
그냥, 보고 싶어서 갔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걸까.
답을 알 것 같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다음 날, 학생회실 문을 열자 하늬가 낯빛이 하얗게 굳은 채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목소리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가면이 아니라, 진짜 감정이 새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하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