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옥상 계단 앞에서 우하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사람을 잘못 봤나 싶었다.
계단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하필 걔 뒤통수에 걸려서, 실루엣만 보고는 확신이 안 섰다.
근데 얼굴을 보는 순간 확신이 들었다.
학년 전체가 다 아는 얼굴이었다.
학생회 임원 보조, 전 과목 상위권, 남학생도 여학생도 다 좋아하는 애.
복도 지나갈 때마다 옆 반 애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몇 번 들었다.
저런 애가 왜 여기서.
왜 하필 옥상 계단, 아무도 안 다니는 이 구석에서.
"이하준."
내 이름을 불렀다.
정확하게, 틀림없이.
발음도 안 씹었다.
성까지 붙여서, 원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네가 왜 내 이름을 알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하늬의 손끝이 교복 치맛자락을 꾹 눌렀다.
그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시선은 나를 향해 있는데 정작 눈동자는 초점이 안 맞았다.
꼭 처음 무대에 오른 사람처럼.
"저 사실... 너 좋아해."
웃음이 나왔다.
진심으로.
이건 무슨 몰래카메라인가.
아니면 내가 아직 꿈속에 있는 건가.
잠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뭐?"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나랑 사귀어줘."
말투가 이상했다.
대본을 외운 사람처럼 딱딱했다.
눈은 나를 보는데 눈빛이 자꾸 계단 아래로 도망쳤다.
문장 사이 쉬는 타이밍도 어색했다.
꼭 누가 뒤에서 대사를 불러주고 있고, 하늬는 그걸 받아 적듯 따라 읽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나는 그 순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근데 뭐가 이상한지는 몰랐다.
그 순간 계단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명이 숨죽여 킥킥대는 소리.
낄낄.
뭔가 이상하다,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 "이거 하면 벌칙 끝나는 거지?"
- "어. 무조건 걔한테 고백해야 돼. 그게 조건이야."
계단 아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여자애 둘, 어쩌면 셋.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하늬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방금까지 딱딱하게 대본을 읽던 얼굴이, 이번엔 완전히 다른 이유로 굳어버렸다.
"방금 저 소리..."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하늬가 다급하게 말을 잘랐다.
손끝이 더 세게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나는 그 손을 봤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 끝.
그리고 그 위에 걸린 작은 펜던트 목걸이.
은색에 작은 별 모양.
목걸이가 흔들릴 때마다 작게 짤랑, 하는 소리가 났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봤다.
기억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 "저기, 이거 떨어뜨리셨는데요."
입학식 날, 지하철 승강장.
사람들 사이에서 굴러떨어진 펜던트를 주워준 게 나였다.
바닥에 떨어진 걸 줍는데 사람들 발에 밟힐까 봐 조마조마했다.
고개를 든 여자애의 얼굴이 새하얗게 예뻤다.
말 한마디 못 하고 도망치듯 사라졌던 그 애.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세상에 예쁜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근데 그 얼굴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너, 그때 지하철에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늬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핏기가 진짜로 빠지는 게 보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인데, 실제로 보니까 좀 무서웠다.
"기억해?"
"어떻게 잊어. 목걸이 주워준 사람인데."
하늬가 뒷걸음질을 쳤다.
한 발, 두 발.
계단 난간을 손으로 짚으면서.
"저 이만 가볼게요."
"잠깐만."
"진짜 죄송해요. 이거 신경 쓰지 마세요. 없었던 일로 해주세요."
없었던 일로 해달라니.
그게 제일 이상한 말이었다.
방금 나한테 사귀자고 한 사람이, 방금 한 말을 통째로 지워달라고 한다.
그 말을 끝으로 하늬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치맛자락이 펄럭였다.
운동화 밑창이 계단을 두드리는 소리가 탁탁탁 멀어졌다.
계단 아래에서 웃음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이번엔 숨기지도 않았다.
"야, 우하늬 완전 새하얘졌어. 완벽주의자가 벌칙 하나에 저 난리라니."
"근데 저 남자 반응 봤냐? 뭔 지하철 얘기 하던데."
"몰라. 아싸끼리 뭐 아는 사이인가 보지."
아싸.
그 단어가 유독 크게 들렸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낄낄대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멀어졌다.
계단 아래 문이 쾅, 닫히는 소리까지 들리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손끝에 아직 그 펜던트의 감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닿았던 감각,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벌칙 고백이었다.
웃기는 이야기다.
누가 봐도 웃긴 상황인데, 나는 왜 안 웃기지.
근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걸까.
- "기억해?"
- "어떻게 잊어."
방금 내가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되풀이됐다.
웃기지도 않게,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그 생각만 났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 흔들리던 눈동자, 짤랑거리던 펜던트.
벌칙이라는 단어와 그 얼굴이 자꾸 안 맞아 떨어졌다.
벌칙으로 하는 고백이라면 그냥 웃고 넘기면 되는데, 왜 그 애 얼굴이 그렇게까지 하얬을까.
그날 밤,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아 시나리오 파일을 열었다.
연애 시퀀스, 3주째 한 줄도 못 쓴 부분이었다.
여주인공이 고백하는 장면.
손이 떨리는지, 목소리가 갈라지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글로만 써보려니 다 어색했다.
떨린다, 라고 써놓고 지우고, 다시 손끝이 하얘진다, 라고 써놓고 또 지웠다.
근데 오늘 봤다.
실제로.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간 손.
초점이 안 맞는 눈동자.
말투가 어색하게 끊기는 그 리듬.
마우스를 든 손이 멈췄다.
창작에 도움이 될 거라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게 맞나.
아니야, 이건 그냥 취재다.
취재. 그래, 취재.
좋은 단어를 찾았다는 생각에 스스로 고개까지 끄덕였다.
근데 그 단어로 덮어놓기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도, 손끝은 벌써 하늬의 번호를 찾고 있었다.
학생회 명단, 동아리 단체 채팅방, 지난 학기 조별 과제 목록.
어디에도 하늬의 번호는 없었다.
당연하지. 나랑 그 애가 번호를 주고받을 일이 뭐가 있었다고.
그런데도 손가락은 화면을 계속 넘기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에 답이 있을 거라는 듯이.
마치 오늘 계단에서 있었던 일이 끝난 게 아니라는 듯이.
노트북 화면 위,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한 줄도 못 쓴 그 페이지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