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따의 이상 체질

4화

눈을 감았던 건 정말 짧은 순간이었을 텐데, 그 사이 내 몸은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인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승강장의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것도, 형광등 불빛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도 인지했지만, 그 인지가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의 시간차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남자의 주먹이 날아오는 궤적을, 나는 마치 슬로우모션으로 보듯 정확하게 읽어냈고, 상체를 살짝 비틀며 그 주먹을 흘려보냈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왼발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가며 무게중심을 낮췄는데, 이 모든 동작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어, 이게 뭐지.' 당혹감이 스쳤지만, 몸은 이미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수도 없이 반복했던 동작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다가 이제야 꺼내 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퍼억! 내 오른손이 남자의 복부에 정확히 박혔고, 남자는 숨이 턱 막히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를 움켜쥔 채 헐떡이는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걸 보면서도, 나조차도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덤프트럭에 치인 것 같은 충격이었을 텐데, 정작 내 주먹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마치 몸 안에 있던 무언가가 잠에서 깨어난 느낌이었다. 아버지가 프로 복싱 선수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지금 이 순간까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사실 아버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이런 순간에 갑자기 그 핏줄이 발동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의문을 곱씹을 여유조차 없었다. 남은 두 명이 순간 얼어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 뭐야 이거·····." 한 명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앞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발바닥이 타일 바닥을 미끄러지듯 밀어내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멈춰야 하는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몸은 그 생각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몸을 조종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조종이 나에게 아주 익숙한 것처럼도 느껴졌다. 낯선데 낯설지 않은, 이상한 이중감각이었다. 두 번째 남자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붙잡으려는 순간, 나는 그 팔을 가볍게 잡아채며 몸을 돌렸다. 그 회전력이 그대로 상대의 팔에 전달되었는지, 남자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으아악!" 수수깡을 부러뜨린 것 같은 느낌이었을까, 남자의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채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아무런 동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게 정상인가, 사람을 이렇게 다치게 했는데 이 정도로 태연할 수 있다는 게. 승강장에 남아 있던 몇몇 승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꺼내 이 상황을 촬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이거 찍히면 안 되는데.' 당장 내일까지 풀어야 할 수학 문제집도 마무리 못 한 상태인데, 이런 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면 반 애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담임 얼굴이 스치듯 떠올랐고, 동시에 이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그런 생활밀착형 걱정이 불쑥 튀어나왔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지금 걱정해야 할 게 저것보다 더 급한 게 있을 텐데. 세 번째 남자가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드는 게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이 접이식 칼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내 몸은 또다시 반사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칼날이 접혔다가 펴지는 그 짧은 순간의 딸깍거리는 소리마저도 선명하게 들렸다. 찰칵. 차가운 금속 빛이 승강장 조명 아래에서 번뜩이는 걸 보면서도, 나는 이상하게 두려움보다 어떤 확신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도, 그 박동 속에서 오히려 침착함이 자라나는 느낌이었다. '이건, 어떻게 해도 안 맞아.'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몸을 낮추며 그 남자를 향해 발을 뻗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는 게 보였다. 마치 자신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칼을 쥔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승강장의 형광등이 그 칼날 위에서 부서지듯 반사되었고, 그 빛의 파편이 내 눈에 박히는 순간— 내 발끝이 이미 그의 손목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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