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날은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늦게 지하철을 탄 날이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는데, 자율학습이라는 게 이름만 자율이지 사실상 강제나 다름없어서 매번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승강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창백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어폰을 낀 채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화면 속에서는 오늘 못 끝낸 수학 문제집 사진이 떠 있었다.
'아, 이거 내일까지 풀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화면만 보고 있을 때, 열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크린도어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고, 나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몇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몇 칸 떨어진 곳에 낯익은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학교 1학년 배지를 단 애였다. 안경을 쓰고 마른 체형에 어깨를 움츠린 자세로 손잡이를 붙잡고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불편해 보였다. 처음엔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마치 먹잇감이 된 작은 동물 같았다.
그 아이 뒤로 덩치 큰 남자 셋이 슬쩍 다가서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 소매 밖으로 살짝 드러나 있었다.
'저거 딱 봐도 삥 뜯길 표정인데.'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애써 시선을 돌리려고 했다. 남의 일에 끼어들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괜히 오지랖 부렸다가 SNS에 얼굴 팔리고 신상 털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런 뉴스를 몇 번 본 적이 있었고, 그래서 더더욱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열차가 다음 정거장에서 멈추고 사람들이 대부분 내리자, 남은 몇 명 안 되는 승객 사이에서 그 상황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텅 빈 객차 안에 남은 건 나와 그 후배, 그리고 세 명의 덩치들, 그리고 저 끝에서 자는 척하고 있는 아저씨 한 명뿐이었다.
"야, 지갑 꺼내라니까."
덩치 중 하나가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그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손아귀 힘이 상당한 듯, 아이의 팔뚝이 하얗게 눌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아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 뒷걸음질도 몇 걸음 못 가서 다른 남자의 몸에 부딧혀 막혔다.
다른 승객들은 못 본 척 시선을 피했고, 자는 척하던 아저씨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하려고 했다. 이어폰 볼륨을 조금 더 높이고,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이가 겁에 질려 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그 눈빛이 마치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 눈빛을 외면할 자신이 없었다.
"저, 저기요, 도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하나가 아이의 뒷목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조용히 안 해?"
그 손짓이 얼마나 거칠었던지, 아이의 안경이 살짝 삐뚤어졌다. 그 순간 열차가 다음 역에 정차하며 문이 열렸는데, 남자 셋 중 하나가 아예 아이를 끌고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이의 발끝이 승강장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이건 네가 낄 일이 아니야'라는 목소리와 '저러다 진짜 큰일 나겠는데'라는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는데, 결국 몸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는 것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 저기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렸다. 텅 빈 승강장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덩치 큰 남자 하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이건 또. 껴들지 마라, 다칠라."
그 목소리에는 조롱과 여유가 섞여 있었는데, 마치 파리 한 마리를 쳐다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말과 동시에 나머지 두 명이 아이를 놓고 나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아이는 그 틈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는데, 완전히 놓여난 건 아니고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승강장 조명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다. 몇 안 남은 승객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있었는데, 그중 누구도 도와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 역시 5분 전까지는 저들과 똑같은 마음이었으니까.
'119에 신고를 해야 하나, 아니 이미 늦었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입안이 마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오히려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마치 폭풍의 눈 속에 들어간 것 같은, 묘하게 고요한 상태였다.
'이거 잘못하면 진짜 큰일 나는데.'
'내일 학교는 갈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 병원비가 더 걱정인데.'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뒤섞여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 가장 앞에 있던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덩치가 상당해서 마치 냉장고 하나가 걸어오는 것 같았는데, 그 주먹은 내 얼굴보다 훨씬 커 보였다.
쿵!
남자의 발이 승강장 바닥을 찍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발소리 하나만으로도 승강장 전체가 진동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남은 승객들은 이제 완전히 등을 돌린 채 도망치듯 물러섰다.
나는 그 순간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