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렇게 오 년이 흐르고, 그해 겨울이 가장 깊었을 무렵, 나는 사흘 밤을 연속으로 야근한 상태였고,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았고, 손끝은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 상태로도 매일 아침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야 했다. 창밖으로는 겨울비인지 눈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들이 흩날리고 있었고, 사무실 안 히터 소리와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건조하게 느껴지던 아침이었다.
그날 오전 회의실로 들어서기 전, 나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얼굴에 찬물을 두 번이나 끼얹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낯설 정도로 초췌했는데, 그 얼굴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던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저 이 보고서만 무사히 넘기면,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회의 테이블에는 나를 포함해 여섯 명이 둘러앉아 있었고, 박준호 과장은 상석에서 팔짱을 낀 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끝이 서류를 넘길 때마다 나는 종이 소리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준비한 분기 실적 보고서 앞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박준호 과장은 내가 준비한 분기 실적 보고서를 회의 테이블 위로 툭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걸 보고서라고 가져온 거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냉소는 회의실 안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의자를 뒤로 젖히며 나를 훑어보듯 시선을 위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며 혀를 찼다. "김도윤이, 너 같은 애들이 딱 그래. 오 년이나 다녔으면 뭔가 배웠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 수준이면 그냥 나가는 게 회사한테도 도움 되는 거 아니야?"
회의실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신입사원 하나가 숨을 죽이며 시선을 내리는 게 보였고, 맞은편의 대리는 애매하게 웃으며 서류철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오 년이라는 시간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밤새워 고친 자료들, 놓친 끼니들, 주말에도 노트북을 펼쳐두고 씨름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그대로 뭉개지는 느낌이었다.
손끝이 떨려오는 걸 애써 감추려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숨겼지만, 이미 얼굴은 하얗게 굳어 있었을 게 분명했다. 목 안쪽이 뜨겁게 조여오는 것 같았는데, 그게 화 때문인지 억울함 때문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든 버텨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과장님, 그건 좀 심하신 말씀 아닌가요." 소영 선배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의 담담함과는 다르게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그건 내가 처음 보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늘 회의 시간에도 조용히 메모만 하던 그녀가, 이렇게 정면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입사 이래 처음이었다. "오 년 동안 도윤 씨가 세운 실적, 과장님도 알고 계시잖아요."
"한소영 씨는 또 이렇게 편들고. 둘이 뭐, 사귀는 거야?" 박준호 과장이 그렇게 비꼬는 투로 대답하는 순간, 회의실 안의 공기가 한층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누군가 작게 헛기침을 했고, 창밖에서 들려오던 자동차 경적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왔다.
나는 그 순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지만, 그와 동시에 소영 선배의 이름이 이런 식으로 오르내리는 게 더 견딜 수 없었다. 오 년 동안 참아왔던 모욕들, 야근을 당연시하던 시선들, 성과를 빼앗기고도 웃어야 했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목 안쪽에서 치밀어 올랐고, 그것이 마침내 넘쳐흐르기 직전이라는 걸 나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뚝!
나는 그 자리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회의실을 채웠고,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오히려 그 순간 이상하게 머릿속이 맑아지는 걸 느꼈다. 마치 오 년 동안 쌓인 안개가 한순간에 걷혀버린 것처럼.
"과장님." 나는 낮게, 그러나 또렷하게 그를 불렀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차분하게 나올 수 있다는 게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박준호 과장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그는 아직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저, 오늘부로 그만두겠습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회의실 안은 완전한 정적에 휩싸였다.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지나치게 크게 들려왔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박준호 과장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뭐?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그는 팔짱을 풀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는데, 그 얼굴에는 여전히 이 상황이 우스운 협박 정도로만 보이는 듯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 "너, 지금 그만두면 어디 갈 데도 없을 텐데. 그냥 앉아. 다시 준비해서 오후에 가져와."
"오 년 동안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서류 가방을 챙겨 들었다.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이 두려움 때문인지 후련함 때문인지 나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가방을 어깨에 걸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오 년치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첫 출근날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던 순간부터, 밤샘 야근 끝에 동료들과 나눠 마시던 편의점 커피, 그리고 지금 이 자리까지.
그 순간, 나는 소영 선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놀람과 걱정, 그리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닫히는 걸 보면서, 그녀도 무언가 말을 하려다 삼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선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에도, 나는 회의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지만, 걸음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으려 애썼다.
"도윤 씨—" 뒤에서 소영 선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뒤돌아보면,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걸음마저 붙잡을 것 같은 다급함이 등 뒤로 느껴졌지만, 나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대로 밀고 나갔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는 순간, 나는 오 년 전 그날 이 복도를 처음 걸었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신입사원 명찰을 목에 걸고, 안내판 앞에서 회의실 위치를 몇 번이나 확인하던 그날의 나. 긴장한 손으로 서류철을 가슴에 안고, 상사들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던 그 얼굴. 아무것도 모르고 안내판만 확인하던 그 신입사원과, 지금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걸어가는 나 사이에는, 도저히 좁혀지지 않을 것 같은 거리가 있었다.
복도의 창문 너머로는 여전히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이 흩날리고 있었고, 사무실 안의 소음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차단된 것처럼 조용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이 복도를 걷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그 생각에 슬픔보다는 묘한 해방감이 먼저 밀려왔다.
그런데 등 뒤에서, 다급한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