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사직서가 든 봉투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흰 봉투 하나에 오 년이라는 시간이 담겨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그 가벼움에 오히려 손끝이 저려오는 걸 느끼며 인사팀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복도 형광등이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 저 안쪽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 그리고 내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전부가 지나치게 크게 들려오는 아침이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3월의 아침 햇살이 복도 유리창을 타고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빛줄기 속에서 먼지 몇 알이 느릿하게 떠다니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눈에 담지도 않았을 그런 사소한 풍경까지, 오늘은 이상하게도 하나하나 눈에 걸려 넘어졌다. 마치 이 건물의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눈에 새겨두려는 사람처럼.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그 생각을 애써 밀어내며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문고리에 닿기 직전에야 자각했다.
오 년. 나는 그 숫자를 입속으로 되뇌어보았다. 신입사원 김도윤이 처음 이 건물 정문을 통과한 게 꼭 오 년 전 이맘때였고, 그날의 봄볕은 오늘처럼 뻔뻔할 정도로 따가웠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던 그 순간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는데, 그건 아마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그 시작과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자리이기 때문일 거였다.
[그날,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걸 보지 못했다.]
5년 전 봄, 첫 출근날 아침이었다. 새로 산 정장 재킷의 어깨가 유난히 뻣뻣하게 느껴졌고, 사원증 목걸이는 목에 걸린 게 아니라 걸려 있는 게 어색해서 자꾸만 손이 그쪽으로 향했다. 구두는 아직 신발장의 냄새를 다 벗지 못했는지 발끝을 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서 나는 로비를 걸어가는 내내 자꾸만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나는 로비에서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길에 세 번이나 안내판을 다시 확인했는데, 그럼에도 정작 몇 층인지는 기억하지 못한 채로 무작정 사람들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나 하나쯤 티가 안 날 거라는 얄궂은 안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뒤쪽에 슬며시 몸을 붙이고 서서 손에 든 종이컵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뒤늦게 뛰어들어오는 누군가와 부딪히면서, 내가 들고 있던 종이컵 속 아메리카노가 그대로 쏟아졌고, 그건 정확히 앞에 서 있던 여자의 크림색 블라우스 위로 튀어버렸다.
촤악—
나는 그 소리가 들리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뜨거움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고,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서대로 눈에 들어온 건, 어깨선까지 오는 갈색 단발머리가 흔들리는 모습, 그 아래 얼룩진 크림색 블라우스, 그리고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사원증에 적힌 '한소영'이라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읽는 순간에도 나는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쏠리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누군가는 작게 헛기침을 했고, 누군가는 눈치를 살피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 모든 시선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그녀는 짧게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얼룩을 톡톡 닦아냈는데, 목소리에 짜증이라곤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아서 나는 오히려 그게 더 당황스러웠다. 나였다면 분명 눈살을 찌푸리고 한마디라도 쏘아붙였을 텐데, 그녀는 마치 이런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태연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세탁비는 제가—" 내가 그렇게 말을 더듬는 사이,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픽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얄미우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종류의 웃음이었다는 걸, 나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신입사원이죠? 사원증 아직 목에 안 걸어놓은 거 보면."
그 말에 나는 황급히 사원증을 목에 걸었고, 그 어설픈 동작을 본 그녀는 참았던 웃음을 결국 터뜨렸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도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어디로든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업부 김도윤이에요, 오늘부터 출근합니다." 나는 그렇게 자기소개를 했고, 그녀는 짧게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어, 나랑 같은 팀이네. 한소영, 앞으로 잘 부탁해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왜인지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게 실수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나는 얼룩진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가 태연하게 자기 자리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봤다. 그녀가 앉은 자리는 내 자리와 대각선으로 마주 보는 위치였고, 그 사실을 알아챈 순간 나는 왠지 하루 종일 그 방향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 우연한 사고가,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버티게 해준 유일한 끈의 시작이었다는 걸 그날의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사무실로 들어서던 그 순간, 나는 그저 '망했다, 첫날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하는 생각뿐이었으니까.
그 뒤로 오 년. 야근이 이어지던 밤마다 자판기 커피를 나눠 마셨던 시간들이, 실적 압박에 짓눌려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던 순간들이,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유일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그 사람이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같은 건물, 같은 층, 같은 팀에 있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목덜미를 조여왔다.
삑ㅡ
출입 카드가 리더기에 닿는 소리에,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인사팀 문 앞에서 손끝만 만지작거리던 나는 봉투를 다시 한번 꽉 움켜쥐었고, 손바닥에 배어 나온 땀 때문에 흰 종이 겉면이 살짝 눅눅해지는 걸 느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짧게 울렸지만, 나는 그것을 꺼내볼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건 오직 이 문 너머에서 벌어질 일뿐이었으니까.
'오늘로 끝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고,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냉기가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대로 문을 열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나는 거였다. 오 년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 얽혀 있는 한소영이라는 이름과,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이상하게 뛰는 이 심장까지도.
그런데 문을 열기도 전에, 안쪽에서 먼저 문이 벌컥 열렸다.
탁!
"어? 김도윤 씨, 여기서 뭐 해?"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인사팀 직원이 아니라, 다름 아닌 박준호 과장이었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봉투로 곧장 향하는 걸 보며, 나는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흐르는 걸 느꼈다.
박 과장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봉투에서 내 얼굴로, 다시 내 얼굴에서 봉투로 오가는 그 시선의 움직임이 마치 초침처럼 정확하고 냉정해서, 나는 저도 모르게 봉투를 등 뒤로 숨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나는 그의 표정이 굳어가는 걸 보며 직감했다.
"그거... 설마 그거 아니지?" 박 과장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