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가을이 완전히 저물고 겨울로 접어들 무렵, 나는 이미 신입사원이라는 티를 어느 정도 벗어내고 업무에도 제법 손이 익어가고 있었지만, 그와 반비례하듯 박준호 과장의 시선은 점점 더 집요하게, 그리고 노골적으로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신입이니 좀 더 엄하게 가르치려는 건가 싶어 넘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지적은 업무의 영역을 벗어나 나라는 사람 자체를 겨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도윤, 이 보고서 이따위로 쓸 거면 그냥 집에 가." 그는 회의 시간마다 내가 올린 서류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그렇게 말했고, 그 손끝이 종이를 두드릴 때마다 나는 속에서 뭔가가 조금씩 깎여나가는 걸 느꼈다. 처음 몇 번은 정말 내가 부족해서 듣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참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지적이 사실 관계와는 무관하게 그저 나를 깎아내리기 위한 도구처럼 쓰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다른 팀원이 비슷한 실수를 해도 박 과장은 그저 "다음엔 조심하자" 정도로 넘어가는데, 유독 내 서류 앞에서만 목소리가 커지고 표정이 굳는 걸 몇 번이고 확인했으니까.
겉으로는 "네, 다시 수정하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매번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특히 다른 팀원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애써 참느라 손끝이 저려올 정도였고, 회의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귀가 멍한 채로 앉아 있어야 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까 봐 일부러 모니터에 시선을 박고 앉아 있으면, 그 정적 속에서 내 숨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나를 조용히 다독여준 건 역시 소영 선배였다. 회의가 끝나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자리로 다가와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가거나, 지나가는 척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고 갔다. 어떤 날은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였고, 어떤 날은 탕비실에서 갓 내린 아메리카노였는데, 그녀는 늘 별다른 말 없이 "힘내요" 한마디만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사소한 행동들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나는 매번 그녀가 자리로 돌아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온기를 느끼며 앉아 있었다. 컵을 감싼 손끝에 남은 온도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일부러 그 열기를 붙잡아두려는 사람처럼 컵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날은 야근이 유난히 길어진 밤이었다. 프로젝트 마감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사무실에는 형광등 불빛만 유난히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고, 다른 자리는 이미 컴퓨터가 꺼진 채 어둑했다. 나와 소영 선배 둘만 남아 있었고, 시계는 이미 밤 열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초겨울의 찬 기운이 유리창에 부딪혀 뽀얗게 서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나는 그 서린 유리 너머로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을 흘깃거리며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보고서와 씨름하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자꾸만 엉키고, 몇 번이나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던 문장은 여전히 매끄럽지 않았다. 나는 계속되는 오타와 실수에 지쳐 결국 키보드에서 손을 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소영 선배가 의자를 끌고 내 옆으로 다가와 모니터를 함께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기, 이 문장 순서만 바꾸면 될 것 같은데."
그녀가 몸을 기울여 화면을 가리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어깨가 내 팔에 살짝 닿는 걸 느꼈고, 그 짧은 접촉에 심장이 이상하게 크게 뛰는 걸 자각하며 숨을 멈췄다. 그녀에게서는 늦은 밤까지 남아 있었던 사람 특유의, 은은한 커피 냄새와 섬유유연제 냄새가 섞여 풍겨왔는데, 나는 그 냄새를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자꾸만 코끝이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화면에만 시선을 두고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어가며 설명을 이어갔지만, 나는 그 순간 그녀의 옆얼굴을 흘깃 보며 '이 사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하는 생각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하면 문맥이 훨씬 자연스러워져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세웠고, 나는 그제야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방금 전의 그 짧은 접촉이 팔에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윤 씨, 요즘 많이 힘들죠." 그녀가 불쑥 그렇게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순간 목이 메어오는 걸 느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안에 어쩐지 걱정이 배어 있어서, 나는 그 말 한마디에 며칠간 쌓아왔던 긴장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걸 느꼈다. "괜찮아요, 다들 이 정도는 하잖아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뻗어 내 손등 위에 잠깐 얹었다.
"괜찮지 않아도 돼요. 도윤 씨는 늘 너무 참으려고만 하니까." 그녀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고, 그 온기가 손등을 타고 팔까지 번지는 것 같았는데, 나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눈을 내리깐 채 그녀의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목 안쪽에 뭔가가 걸려서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탁—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손을 떼며 화들짝 놀랐다. 문 앞에는 박준호 과장이 서 있었는데, 그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둘이 아직 안 갔어? 뭐 좋은 분위기네." 그의 말투에는 은근한 비아냥이 섞여 있었고, 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급히 시선을 내렸다. 심장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쿵쿵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오는 걸 애써 책상 밑으로 감추었다.
소영 선배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프로젝트 마감이라 야근 중이었어요, 과장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나는 그 담담함 아래 살짝 떨리는 기색을 눈치챘다. 박준호 과장은 그 대답에 픽 웃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내 책상 위 서류를 손가락으로 넘겨보며 말했다. "이 정도 일로 밤새워야 한다는 게, 김도윤이 능력이 딱 이 정도라는 뜻이겠지." 그는 서류를 넘길 때마다 일부러 소리를 내는 것처럼, 종이 끝을 손톱으로 튕겨가며 말을 이었다. "선배가 옆에서 다 봐주는데도 이 정도라니, 참."
그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였고, 소영 선배가 뭐라 반박하려고 입을 여는 걸 눈으로 만류했다. '더 말하면 선배까지 곤란해질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정작 그 생각의 밑바닥에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왜 나는 매번 이 순간에 아무 말도 못 하는 걸까, 왜 나는 이렇게 작아지는 걸까, 그런 물음이 뒤엉킨 채로 목 안에 걸려 있었다.
박준호 과장은 그 정적을 만족스럽다는 듯 내려다보다가, 곧 흥미를 잃은 표정으로 돌아서며 말했다.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말고, 적당히 하고 가." 그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기 자리 쪽으로 걸어갔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가, 이내 다시 흐릿하게 가라앉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완전히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도, 사무실 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소영 선배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밤, 결국 보고서는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겨우 마무리되었고, 사무실을 나설 때 소영 선배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지만 우리 둘 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소영 선배와 있었던 그 짧은 순간을 자꾸만 되짚어보게 되었다. 그녀의 손이 내 손등에 닿았던 그 온기가,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과 함께.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박준호 과장이 그 문을 열고 들어서던 순간의 그 표정이, 마치 뭔가를 확인했다는 듯한 그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나는 앞으로 그가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