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왕님 전담 셔틀 졸업

5화

똑똑똑. 학생회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소은이 나를 불렀다. "이도윤 학생, 잠깐 들어와볼래요?"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묘한 힘이 있어서 나는 순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서 학생회실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거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고, 문고리를 잡은 손끝이 살짝 차가워지는 걸 느끼며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 위에는 내가 지난주에 정리해서 제출한 학생회 업무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다. 표지부터 시작해 통계표까지 하나하나 넘겨본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어떤 페이지는 접힌 채로, 또 어떤 페이지는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채로 남아 있었다. 한소은은 안경을 살짝 올리며 그 문서를 톡톡 손끝으로 두드렸다. "이거, 자원봉사 시간 채우려고 대충 낸 거 아니죠?" 나는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잠시 머뭇거렸다. 눈앞에 앉은 그녀는 학생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에 걸맞게 등을 곧게 펴고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은 흐트러짐 없이 정갈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저는 그냥 맡은 걸 제대로 하고 싶어서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맡겨진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다음에 또 무언가를 부탁받을 자격조차 없어질 거라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몸에 새겨진 습관 같은 감각이었을 뿐이다. 한소은은 잠시 나를 재보듯 훑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웃음은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무언가를 가늠하고 저울질하는 사람의 웃음처럼 보였다. "보통 학생들은 이렇게까지 안 해요. 통계까지 정리해서 표로 만든 거, 누가 시켰어요?" "아무도 시키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 대답에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덮었다. 종이가 겹쳐지며 나는 마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은 그렇게 끝맺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훑고 있었다. 마치 물건을 사기 전에 값을 매기는 사람처럼.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학생회 쪽에서 심부름을 부탁받았다. 서류를 다른 반에 전달하거나, 행사 준비물을 창고에서 옮기거나, 회의록을 정리하는 일들이었다.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럴 때마다 한소은은 별다른 말 없이 나를 지켜보곤 했다. 내가 상자를 옮기다가 손등을 긁혔을 때도, 그녀는 다가와서 상처를 살펴보는 대신 그저 "괜찮아요?"라는 한마디만 던지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걱정이라기엔 지나치게 담백했고, 무관심이라기엔 묘하게 신경 쓰는 듯한 태도였다. 잉크와 종이 냄새가 뒤섞인 서늘한 향이 그녀 곁에 늘 감돌았다. 학생회실 특유의 냄새인지, 그녀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는데, 그 냄새는 윤서아의 짙은 재스민 향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긴장시켰다. 재스민 향은 달고 끈적하게 감기는 느낌이었다면, 한소은의 향은 종이 위에 찍힌 인장처럼 차갑고 분명했다. *** 한편 오하린과의 시간은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방과 후 옥상 계단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는데, 처음엔 정말로 우연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자주 겹쳤다. 그녀는 계단 중턱에 앉아 나를 기다리다가, 내가 올라오는 발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곤 했다. "선배, 오늘도 여기 있네요?" "너도." 그런 시시한 인사를 주고받는 게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녀는 매번 내가 만든 반찬 이야기를 꺼내며 웃었다. 별것 아닌 계란말이나 콩나물무침 이야기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해했고, "선배는 진짜 못하는 게 뭐예요?"라며 장난스레 묻기도 했다. "선배, 다음 주에 제 생일인데요." 그녀가 슬쩍 흘리듯 말했을 때, 나는 별생각 없이 되물었다. "그래?" 그때는 그냥 넘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좁은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생일. 누군가의 생일을 챙긴다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헤아려보다가,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켜 낡은 휴대폰을 켜고 조용히 인터넷을 뒤져가며 간단한 케이크 만드는 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내 생일마다 직접 케이크를 구워주셨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오븐도 없는 좁은 부엌에서, 어머니는 늘 프라이팬 하나로 스펀지케이크를 구워내곤 하셨다. 반죽을 젓는 소리, 프라이팬 뚜껑을 덮을 때 나던 달그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부엌 가득 퍼지던 달콤한 냄새까지도 아직 선명했다. 나는 화면을 넘겨가며 오븐 없이 만드는 방법을 하나하나 찾아 메모했다. 밀가루와 계란의 비율, 프라이팬의 온도, 뚜껑을 덮고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까지. 오랜만에 손끝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한다는 게 이렇게 설레는 일이었는지, 잊고 지낸 감각이었다. *** 그런데 그날 저녁, 옥상에서 오하린과 헤어진 뒤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3층 창문 너머로 낯익은 그림자를 보았다. 한소은이었다. 그녀는 유리창에 몸을 살짝 기댄 채, 방금 헤어진 나와 오하린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밖 노을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빛 때문인지 표정이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다. 흥미와 계산이 뒤섞인 미묘한 빛이 그 눈동자 안에 어려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신발 밑창이 계단을 딛는 소리만이 텅 빈 복도에 울렸다. 하지만 한소은은 그 자리에 남아 낮게 중얼거렸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네." 그 말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나조차 듣지 못한 채 계단을 내려갔고, 그녀 역시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작게 속삭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눈빛만큼은 그날 이후로도 오래 잊히지 않을 만큼 서늘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온 무언가가 이제야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 다음 날 등교길, 나는 정문 앞에 낯익은 실루엣이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윤서아였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햇살 아래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늘 도도하게 치켜든 턱, 여유롭게 늘어지던 걸음걸이 대신, 오늘은 발끝을 초조하게 까딱거리고 있었고, 표정에는 예전의 오만함 대신 뭔가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그녀를 지나쳤다. 어제 한소은이 지어 보인 서늘한 눈빛, 그리고 오하린과 나눈 소소한 대화들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어서였는지, 그녀에게 특별히 시선을 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가 발끝까지 떨리게 만들었다. "이도윤, 나 진짜 마지막으로 할 말 있어." 그 한마디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등 뒤로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이 유난히 무겁게 다가왔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나는 뒤돌아보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마지막이라는 말. 그 단어가 품고 있는 무게가 아침 공기보다 더 차갑게 목덜미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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