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왕님 전담 셔틀 졸업

2화

차단. 그 한 글자가 만들어낸 정적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끝으로 화면을 터치하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말 이걸로 끝난 건가, 하는 의문이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나는 그 의문을 애써 밀어냈다. 다음 날 아침 등굣길에서, 나는 평소보다 발걸음이 가볍다는 걸 느끼며 살짝 놀랐다.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접어들 때까지도 몸이 이상하게 들썩거렸다. 어깨를 짓누르던 뭔가가 사라진 기분이었는데, 그 기분이 낯설어서 오히려 불안했다. 마치 오랫동안 등에 지고 다니던 돌덩이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것처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앞으로 쏠릴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 있었다. 익숙한 무게가 사라지자 몸이 허공에 뜬 것처럼 균형을 못 잡는 느낌,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는 기분이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서도, 신호등 앞에 멈춰 서서도 나는 자꾸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차단이 풀리지는 않았는지, 혹시 다른 번호로 연락이 온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이나 잠금화면을 켜고 끄기를 반복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윤서아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평소처럼 팔짱을 끼고 뭔가를 명령하려는 듯한 걸음걸이,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그녀를 지나쳐 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가방을 내려놓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천천히, 담담하게 움직였다. "야, 이도윤." 부르는 소리에도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부름을 무시한 순간이었다.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이는 심장 소리가 귓속까지 울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책을 펼쳤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이 유난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윤서아의 눈매가 순식간에 좁아지는 게 시야 끝에 걸렸다.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책상 옆에 우뚝 섰다. "뭐야, 왜 씹어?"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교실 안 몇몇 시선이 우리 쪽으로 몰렸고, 낮게 속닥거리는 소리들이 등 뒤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그 시선들 속에서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늘 도망치고 싶던 시선들이었는데, 오늘만큼은 그 시선들이 나를 지켜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도윤, 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윤서아의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갔다. 나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지만, 그녀 앞에서만큼은 그 떨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짜증스럽게 콧방귀를 뀌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점심시간, 급식실 창가에 혼자 앉아 밥을 먹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딸랑, 하는 알림음이 조용한 급식실 안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오하린이었다. 중학교 때 수학을 봐준 적이 있던 후배였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가끔 안부를 물어오곤 했다. [선배 오늘 표정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ㅋㅋ 급식실에서 봤어요] 나는 그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누군가 내 얼굴을 보고 먼저 걱정을 건넨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헤아려보다가, 답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한참 손끝만 화면 위에서 맴돌았다. 숟가락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 국물을 몇 번 떠먹으면서도 시선은 계속 휴대폰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멀리서 윤서아와 그 무리가 시끄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 같았으면 그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마치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듣는 것처럼. 결국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냥 좀 피곤해서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후회했다. 너무 무뚝뚝한 답장이었나, 싶었다. 그런데 곧바로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힘들면 말해요 선배, 저 진지하게 듣는 거 잘해요] 그 문장이 이상하게 가슴 어딘가를 건드렸다.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걸 느끼며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웃을 수 있는 날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낡은 아파트 앞 골목에서 갑자기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날카로운 마찰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실제로 들린 건지,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순간 눈앞이 하얘지면서, 여덟 살 무렵 병원 응급실 앞에서 아버지 손을 붙잡고 서 있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눈부셨던 그날,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찌르던 복도, 아버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어린 나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날 밤 횡단보도를 건너다 신호를 무시한 트럭에 치였고, 나는 그 소식을 듣던 순간의 형광등 불빛과 소독약 냄새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의사가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던 모습만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말수가 줄었고, 나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스스로 무언가를 참는 법을 먼저 배웠다. 원하는 게 있어도 말하지 않는 법, 화가 나도 삼키는 법, 아프다는 말 대신 괜찮다는 말을 먼저 하는 법. 어쩌면 윤서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도, 그 오래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요구를 거절하는 순간, 그 사람이 나를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언제나 먼저였으니까.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아버지가 아직 퇴근 전인 듯 불 꺼진 거실이 나를 맞았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발걸음 소리만이 텅 빈 집 안에 울렸다. 나는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켜고, 가방을 소파 위에 던져놓은 뒤 냉장고를 열었다. 남은 계란과 파,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밥을 꺼내 볶음밥을 만들기 시작했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파를 잘게 썰어 넣고, 계란을 톡톡 깨뜨려 넣으며, 나는 오하린의 메시지에 뭐라고 답할지 계속 고민했다. 밥이 다 볶아질 때까지도 답을 정하지 못했다. 접시에 볶음밥을 옮겨 담고 식탁에 앉아 한 숟갈 떠먹으면서, 나는 결국 휴대폰을 들었다. 뭐라고 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무 말도 쓰지 않고 그냥 하트 이모티콘 하나만 보냈다. 유치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지금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다음 날, 윤서아가 내 사물함 앞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복도를 걷다가 그녀를 발견한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표정은 어제와 달리 이상하게 굳어 있었고, 팔짱을 낀 채 사물함 문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 손끝의 움직임이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 얼굴을 보며 뭔가 시작되고 있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 불길함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었다. "이도윤." 그녀가 나를 부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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