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오빠, 우리만 사랑해

1화

공항 게이트를 나서자 서울의 겨울 공기가 뺨을 스쳤다.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었다. 코끝이 시렸다. 강도현은 캐리어 손잡이를 고쳐 잡고 잠시 멈춰 섰다. 유리문 너머로 낯선 얼굴들이 지나갔다. 오가는 사람들의 목소리, 안내 방송, 캐리어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 그 모든 것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5년. 손끝으로 셀 수 있는 시간인데도 몸에는 낯설게 감겼다. 할아버지 댁 마당의 흙냄새, 겨울이면 마루까지 스미던 한기, 문풍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 그런 것들이 아직 몸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서울은 그보다 더 차갑고 더 삭막했다. 빌딩 유리에 반사되는 햇빛조차 냉랭하게 느껴졌다. 도현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켰다. 후우— 익숙해져야 했다. 다시. 검은 세단 한 대가 도로변에 서 있었다. 매끈하게 닦인 차체가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기사가 다가와 짐을 받아 들었다. 정중한 손짓, 낮게 숙인 허리. — 도련님,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도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차에 올랐다. 가죽 시트의 서늘한 감촉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창밖으로 익숙하지 않은 빌딩들이 스쳐 지나갔다. 도로는 넓어졌고, 낯선 간판들이 늘어서 있었다. 5년이면 도시도 사람만큼 변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스쳤다. 부모님은 여전히 해외였다. 사업 확장, 그룹의 미래, 그런 말들 뒤에 아들의 5년은 아무렇지 않게 밀려나 있었다. 전화도 몇 번뿐이었다. 형식적인 안부, 형식적인 격려. 그리고 이제 다시, 그 아들을 서울로 불러들인 것도 결국 사업의 흐름이었다. 후계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도현은 창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눈을 감았다. 잠깐이라도 쉬고 싶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대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저택은 기억보다 더 크고 더 차가워 보였다. 높은 담장,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경, 그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낯설었다. 정원의 나무들은 겨울을 나느라 앙상했다. 가지 끝마다 얼음이 얇게 맺혀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히며 삐걱거렸다. 현관 앞에는 낯익지 않은 얼굴의 메이드가 서 있었다.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 도련님, 어서 오세요. 오랜만입니다. 도현이 그녀를 향해 눈길을 주려던 순간이었다. 쿵. 현관문이 안쪽에서 벌컥 열렸다. 그리고 무언가가 그를 향해 곧장 달려왔다. — 오빠! 흰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도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두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도현은 순간 균형을 잃고 반걸음 물러섰다. 캐리어가 바닥에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서은이...?' 5년 전 검은 숏헤어로 기억하던 얼굴이 지금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흰머리, 그리고 그보다 더 낯선 것은 눈빛이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 눈에는 반가움을 넘어선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향수 냄새가 옅게 풍겼다. 예전엔 그런 걸 쓰지 않던 아이였는데. — 5년이나 걸렸잖아. 오빠 없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아? 서은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도현은 어색하게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 그래, 나도... 보고 싶었어. 잘 지냈어? 대답 대신 서은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입술이 스치기 직전, 간발의 차로 피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 같았다. — 서은아, 뭐 하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 당혹이 섞여 있었다. 서은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짝 다가섰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향해 있었다. — 왜 피해. 나 오빠 좋아해. 진짜로. 짧고 단단한 문장이었다. 장난이라 웃어넘길 여지가 없는 어조였다. 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라졌다. 이건... 뭐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5년 만에 돌아온 집 앞에서, 동생이라 믿었던 아이가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때, 현관 안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 서은이 너 혼자 먼저 안기는 거 반칙 아니야? 검은 숏헤어의 소녀가 팔짱을 낀 채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보름이었다. 5년 전엔 그녀가 롱헤어였는데, 지금은 서은과 완전히 반대로 짧게 잘라져 있었다. 마치 두 사람이 서로의 머리 모양을 맞바꾼 것처럼. 도현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기억 속 보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다. 5년이면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보름은 성큼성큼 걸어와 도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서은을 슬쩍 밀어내며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 오빠, 나도 있잖아. 나부터 봐줘. 서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보름을 향한 시선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 언제부터 순서를 정했는데. — 내가 먼저 오빠 좋아했어. — 그건 네 기억이고. 두 사람의 말이 짧게 부딪혔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날은 선명했다. 도현은 두 사람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니, 이건 겨울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 둘 다... 왜 이래. 우리 남매잖아. 서은과 보름이 동시에 그를 바라봤다. 두 시선이 겹쳤다가 서로를 향해 날카롭게 스쳤다. 자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이 도현의 피부에도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쌓아온 무언가가 지금 이 순간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보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 남매인 거 알아. 그래도 좋아하는 건 못 참겠어. 서은이 곧바로 맞받았다. — 나도 마찬가지야. 오빠, 나 진짜 진심이야. 도현은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장난이 아니었다.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 확신이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머릿속으로 5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어렸을 적 두 아이는 늘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오빠, 오빠, 하고 불렀다. 그때는 그저 어린 동생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두 사람의 눈빛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것을 담고 있었다. 캐리어를 대신 들어 올리던 기사가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현관 앞에 서 있던 메이드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이 광경이 이미 예상됐던 것처럼, 익숙한 일이라는 듯이. 도현은 그 침묵이 더 두려웠다. 마치 이 집 전체가 이 이상한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 저... 도련님. 안으로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메이드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그 목소리에도 어떤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익숙한 상황을 최대한 무마하려는 듯이었다. 도현은 겨우 숨을 골랐다. —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그가 겨우 뱉은 말에 서은과 보름은 동시에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마치 서로 뺏기지 않으려는 듯, 두 손이 각각 그의 팔을 단단히 감쌌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놓지 않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 오빠 방은 그대로 놔뒀어. 내가 매주 청소했거든. 서은이 그의 팔을 더 세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 나도 매일 들여다봤는데. 서은이 네가 청소한 건 그냥 형식이었지. 보름이 곧바로 쏘아붙였다. 서은의 눈매가 다시 좁아졌다. 도현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이도저도 못 하고 끌려가듯 걸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걸음이 무거웠다. 발밑에서 눈이 살짝 밟히는 소리가 났다. 등 뒤로 대문이 철컥, 닫혔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5년 만에 돌아온 집은,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현은 아직 그 얼굴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다. 현관 안쪽, 오래된 샹들리에 불빛 아래로 걸어 들어가는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서은과 보름은 여전히 그의 양팔을 놓지 않았고, 도현의 심장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 집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그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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