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이지안이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그 화려한 붉은 드레스 자락이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끌어당겼다. 짙은 핏빛 실크가 그녀의 걸음을 따라 물결처럼 흔들렸고, 그 색은 마치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다는 선전포고처럼 보였다. 준혁과는 달리 지안의 눈빛에는 절제되지 않은 격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그녀는 입구에서부터 좌우를 훑으며 서하를 찾았다. 그리고 서하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걸어와 팔을 붙잡았는데, 그 손끝의 힘이 예상보다 세어서 서하는 잠시 숨을 삼켰다.
"언니." 지안이 낮게,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 "저택에서 무슨 소리가 도는지 다 들었어요. 그 하녀 년이 헛소리를 지껄였다면서요."
지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열기는 조금도 낮지 않았다. 턱이 팽팽하게 굳어 있었고, 짙게 그린 눈매 아래로 분노가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것이 보였다.
"조용히." 서하가 미소를 유지한 채 낮게 속삭였다. "여기서는 표정을 흐트러뜨리면 안 돼."
"하지만—"
"지안아." 서하가 그녀의 손등을 가만히 덮으며 다시 한번 눌러 말했다. "지금 네가 흔들리면, 내가 그동안 견뎌온 게 다 무너져."
지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타오르는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저 억지로 삼켜 넣은 것에 가까웠는데, 그것이 오히려 서하의 눈에는 더 위태롭게 보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를 품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 지안의 등장이 오히려 서하에게는 큰 힘이 되었는데, 세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만으로도 무도회장의 공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한가의 적녀가 저리 노골적으로 서하의 편을 들고 서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계산은 재빠르게 다시 굴러가고 있었다. 몇몇 귀족들은 처음의 경멸을 거두고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고, 이한가와 척을 지면 좋을 것이 없다는 계산이 그들의 태도를 바꾸어 놓고 있었다.
"이한가의 딸이 저렇게 당당하게 나온 걸 보면, 헛소문이었나 보군." 누군가 슬쩍 흘리는 말이 들려왔고, 그 말이 다시 다른 이들에게 옮겨 가며 분위기는 미묘하게 반전되기 시작했다. 부채 뒤로 숨어 있던 눈들이, 술잔 너머로 비켜 있던 시선들이 다시 서하 쪽을 향했다. 그 시선의 결이 이전과는 완연히 달랐다.
서하는 그 흐름을 놓치지 않고 지안, 준혁과 함께 무도회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세 사람의 발걸음이 묘하게 맞아떨어졌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걸어온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쏟아졌지만, 이제 그 안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색채가 섞여 있었다. 경멸 대신 경계, 확신 대신 의문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서하는 오랜만에 등줄기를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매 순간 숨죽이며 살아온 사람에게는 결코 작지 않은 변화였다. 그녀는 술잔을 살짝 들어 보이며 낮게 웃었고, 그 웃음이 처음으로 억지가 아닌 진짜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는 느낌, 그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서하는 잠시 낯설게 느꼈다.
"이 정도면 됐어요." 지안이 서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이 서하의 관자놀이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저 사람들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는 거 보여요? 처음엔 저를 잡아먹을 듯이 보던 것들이 이제는 슬금슬금 눈을 피해요."
"그래." 서하가 조용히 대답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지만, 그 안에는 지안이 처음 듣는 작은 안도가 스며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난 게 아니야. 도현이 아직 안 왔으니까."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서하의 목소리에 아주 짧은 흔들림이 스쳤다. 손끝에 쥔 술잔이 미세하게 기울었다가 다시 바로 섰는데, 그 잠깐의 흔들림을 준혁이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서하의 곁을 지키며 서 있었지만 그 시선은 항상 그녀의 손끝, 턱선, 호흡의 결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준혁이 그것을 눈치채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손길은 짧았지만 확실한 무게를 담고 있었다.
"오늘 밤은 네가 무너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준혁의 짙은 남색 눈동자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아래 깔린 것은 결코 무심함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폭풍이 오기 전 바다의 표면을 읽는 사람처럼, 이 조용한 순간을 온전히 믿지 않고 있는 듯했다.
서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무도회장을 둘러보았다. 샹들리에의 황금빛이 여전히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악단의 선율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가느다란 선율이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뒤섞이며 실내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는데, 그 평온함이 오히려 서하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 안에서 자신이 조금씩 발판을 되찾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오랜만에 느끼는, 짧지만 분명한 승리의 감각이었다.
지안은 여전히 서하의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주변을 매섭게 살피고 있었는데, 그 눈빛은 마치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짐승처럼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누군가 서하 쪽으로 시선을 오래 두면, 지안은 곧바로 그 시선을 맞받아치며 눈싸움을 걸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눈빛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아무도 언니를 함부로 못 볼 거예요." 지안이 다시 낮게 말했다. "제가 여기 있는 한은요."
서하는 그 말에 옅게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긴장이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지안의 존재가 오늘 밤의 방패가 되어준다 해도, 그것이 영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무도회장 입구 쪽에서 갑작스레 낮은 탄성과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지기 시작했는데, 그 소리의 결이 조금 전 지안이 등장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흥분을 담고 있었다. 지안의 등장이 만들어낸 것은 경계와 셈이었지만, 지금 번지는 이 소리에는 순수한 놀라움과, 어딘가 오래 억눌러온 그리움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서하는 그 소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준혁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방금까지 침착하던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옅게 가시는 것이, 마치 서릿발이 스치듯 순식간에 지나갔다.
"저건..." 준혁이 낮게 내뱉었다. 그의 짙은 남색 눈동자에 처음으로 짙은 경계심이 서렸다. 그 목소리는 평소의 절제된 어조와는 확연히 다른,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듯한 무거움을 담고 있었다.
지안 역시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짧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향했다.
무도회장 입구, 샹들리에의 빛이 유난히 환하게 쏟아지는 그 자리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누군가가 천천히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아마빛에 가까운 순백의 천이 그 존재의 걸음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그 걸음걸이는 병약함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우아했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정갈하고 흔들림 없는 걸음이어서, 마치 오랫동안 그 순간만을 준비해온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을 알아본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여 번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낮은 탄식이 새어 나왔고, 몇몇은 잔을 든 채로 그 방향으로 몸을 돌려 인사를 준비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서하는 그 실루엣을 알아보는 순간,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