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 혼인, 포기 못 합니다

2화

박기준은 도현이 사라진 응접실을 나서며 무거운 숨을 삼켰다. 오래도록 이 가문을 섬겨온 그의 눈에는 방금 벌어진 심문이 얼마나 기울어진 저울 위에서 이루어졌는지가 뻔히 보였으나,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자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녀의 떨리는 손끝이며, 도현의 낮게 깔린 목소리며,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감히 반박하지 못한 침묵까지, 그 모든 것이 이미 결론이 정해진 재판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만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다는 것 또한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고, 마침 정원 한편에 서 있는 이준혁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유리창 너머로 비껴드는 오후의 빛이 준혁의 어깨 위에 옅게 얹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리가 내린 조각상처럼 차갑고 고요해서 박기준은 잠시 창틀에 손을 얹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준혁은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팔짱을 낀 채 저택의 외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짙은 남색 눈동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무표정 안에 켜켜이 쌓인 냉기가 오히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박기준은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목례를 건넸다. "이 도련님.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바람이나 쐬려던 참이었습니다." 준혁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담담함 속에는 억지로 눌러 놓은 무언가가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표정만 보아도 알겠으니." 박기준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낮게 대답했다. "하녀 하나가 신부님을 지목했습니다. 소율 아가씨의 발작이 신부님 때문이라고." 준혁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것은 놀라움이 아니라,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 확인되었을 때의 반응에 더 가까웠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저택의 창문 하나를 올려다보았는데, 그곳이 바로 서하가 사흘째 나오지 않고 있는 방이라는 것을 박기준은 알고 있었다. "근거는 있었습니까." 준혁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이미 답을 짐작하는 자의 서늘함이 섞여 있었다. "근거라 할 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박기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하녀가 방문 앞에서 신부님이 아가씨 방 쪽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을 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도현 도련님은 더 캐물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론이 이미 나 있었던 게지요." 준혁이 낮게 내뱉었다. "증거가 아니라 결론이 먼저였을 테니, 그 하녀의 말은 그저 구실이었을 뿐입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준혁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 집안은 처음부터 서하가 억울해도 억울함을 증명할 자리를 주지 않았으니." 박기준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작가에 들어와 이십여 년, 그는 이 집안이 누구를 지키고 누구를 버리는지를 지겹도록 지켜보아 왔고, 그 저울이 서하 쪽으로 기울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련님." 박기준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괜찮으시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준혁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표정 위로 스치는 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오래 묵은 무언가의 그림자였다. 팔짱을 낀 손끝이 미세하게 옷깃을 그러쥐었다가 다시 풀렸는데, 그 작은 움직임이 그의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다툼을 짐작케 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냉철함과는 다른 결이 섞여 있었다. "이 가문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고는 못 하겠군요." 박기준은 그 말에 숨을 삼켰다. 그것은 단순한 냉소가 아니라, 오랫동안 벼려온 칼끝 같은 발언이었다. 준혁의 남색 눈동자 안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것은 분노라기보다는 차라리 오래 묵은 채무 같은 감정이었는데, 박기준은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마른 침을 삼켰다. 준혁은 그런 그의 반응을 눈치채고는 이내 표정을 지우며 덧붙였다. "제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저... 후작가와 저희 이한가 사이에 얽힌 일이 이번 결혼뿐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한가와... 말씀입니까." 박기준이 조심스레 반문했다. 이 저택에서 이십여 년 몸담아 온 그였지만, 두 가문 사이에 이 결혼 이전의 사연이 있었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준혁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고개를 돌려 다시 저택의 외벽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시선이 닿는 곳은 정확히 서하의 방 창문이었다. 오래된 벽돌색 외벽 위로 비껴든 빛이 그 창문 하나만을 유독 어둡게 남겨두고 있었고, 준혁은 그 어둠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설명을 이어가지 않았고, 박기준도 감히 캐묻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적은 마치 오래된 상처 위에 얹힌 붕대처럼, 건드리면 다시 피가 배어 나올 것 같은 조심스러움을 품고 있었다. 바람이 한차례 정원을 훑고 지나가며 나뭇잎을 흔들었고, 그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대신 메웠다. 박기준은 결국 더 묻지 않기로 하고, 다시 한번 목례를 건넨 뒤 자리를 떠났다. 준혁은 그의 뒷모습이 저택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그 눈빛만은 여전히 서하의 창문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같은 시각, 신부의 방은 커튼이 반쯤 드리워진 채 어스름한 빛만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서하는 사흘째 벗지 못한 웨딩드레스 자락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창가에 앉아 있었다. 아마빛으로 바랜 레이스 장식이 이제는 낡은 종이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이 자신의 처지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서하는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방 안의 공기는 사흘째 갈지 않은 촛대의 기름 냄새와 오래된 천의 습기가 뒤섞여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하는 몇 번이고 드레스를 벗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때마다 손끝이 허공에서 멈추곤 했다. 마치 이 옷을 벗는 순간, 자신이 정말로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결혼식 날, 도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객들이 웅성거리는 예배당 한가운데서 신부만이 홀로 서 있던 그 순간을 서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오르간 연주가 어색하게 두 번, 세 번 반복되던 순간, 그리고 뒷줄에서부터 번져오던 수군거림의 물결까지, 그 모든 감각이 아직도 살갗 위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도현은 소율의 병세가 급작스레 악화되었다는 전갈을 받고 예배당을 뛰쳐나갔고, 서하는 그 뒷모습을 향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서 있어야 했다. 오 년이었다. 오 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켰고, 오 년 동안 그의 약속을 믿어왔는데,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텅 빈 예배당과 사람들의 수군거림뿐이었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그 시간을 견뎌왔던 걸까.* 그날 이후로 서하는 이 방을 나서지 않았다. 처음 하루는 다리에 힘이 풀려 걸을 수조차 없었고, 둘째 날은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으며, 셋째 날인 지금은 그저 이 방 안에 머무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자리인 것처럼 여겨졌다. 사용인들의 눈빛, 그 안에 담긴 동정과 조롱이 뒤섞인 시선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서하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정원 저편에서 준혁의 뒷모습이 보였는데, 그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알아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지금은 그마저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와 나란히 서 있던 낯익은 노인의 실루엣이 박기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서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그저 준혁의 굳은 어깨선과, 이따금 저택 쪽을 향하는 그의 시선만을 보며,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방문 밖에서는 여전히 사용인들의 발소리가 오갔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마치 이 방 전체가 저택에서 지워진 것처럼, 서하는 자신이 점점 투명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하녀조차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쟁반을 문 앞에 내려놓고 도망치듯 사라졌고, 그렇게 놓인 음식은 대부분 손도 대지 않은 채 식어갔다. 문득 서하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사이 부쩍 야위어 핏기가 사라진 손가락 위로 결혼식 날 끼웠던 반지가 헐겁게 걸려 있었다. 그것을 빼야 할지, 그대로 두어야 할지조차 그녀는 판단할 수 없었다. 이미 버려진 신부에게 그 반지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익숙하지 않은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평소 사용인들의 조심스럽고 가벼운 걸음과는 다른, 다급하고 무거운 발소리였다. 서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그 발소리는 점점 더 그녀의 방문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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