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문을 열자 좁은 방 안에 낡은 이불이 깔려 있었다.
방 안엔 볕도 제대로 들지 않아서, 낮인데도 어둑어둑했다.
곰팡이 냄새인지 약초 냄새인지 분간이 안 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위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가 보였다.
강태겸.
한때 제련각 재상이라 불리던 사람이 지금은 이불 위에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릎 아래로 이불이 평평하게 접혀 있었다.
그럴 리가.
마춘삼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눈앞에서 확인하는 순간, 뭔가가 목구멍을 콱 막았다.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아니길 바랐는데, 이불의 평평한 그 라인이 모든 기대를 짓밟아버렸다.
말이 안 나왔다.
평소라면 뭐라도 한마디 씨부렸을 텐데, 지금은 그냥 서 있는 게 전부였다.
"도... 도윤이냐."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눈이 반쯔은 흐려져 있었는데, 그런데도 나를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사람이 늙으면 시력이 나빠진다던데, 저 눈은 시력 문제가 아니라 그냥 나를 4년 동안 기다려서 흐려진 거 아닌가 싶었다.
"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무릎을 꿇고 다가갔다.
손을 잡으려는데 할아버지가 먼저 두 팔을 뻗어 나를 끌어당겼다.
마른 몸이었지만 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저 팔로 어떻게 다리 없는 몸을 지탱하고 여기까지 앉아 계셨을까,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살아 있었구나. 살아... 있었어."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서툴렀다.
몇 번을 쓰다듬다가 힘이 부족해서 손이 떨리는 것도 그대로 느껴졌다.
코끝이 찡해졌다.
농담이다, 라고 스스로 말하려 했지만 이번엔 그 말이 잘 안 나왔다.
진짜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300년을 넘게 갇혀 살면서도 안 울었던 놈이, 이불 깔린 방구석에서 울 뻔했다는 게 스스로도 웃겼다.
"이 다리는요."
간신히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할아버지가 웃으려 했지만 표정은 슬픔에 더 가까웠다.
"괜찮다. 이제 와서 다시 붙을 것도 아니고."
괜찮다는 말이 제일 안 괜찮게 들렸다.
저 말투, 저 표정.
어릴 때부터 봐온 할아버지는 저런 식으로 자기 아픈 건 늘 축소해서 말하는 사람이었다.
재상 자리에 있을 때도 몸이 안 좋아도 "괜찮다" 한마디로 넘어가던 사람.
그게 하나도 안 변했다는 게 반갑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욥기 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지키긴 개뿔, 그냥 견디는 거지.
저 성경 구절 인용하는 놈은 대체 누군지 모르겠는데, 이럴 때마다 꼭 한마디씩 거든다.
타이밍도 절묘하게 안 좋다.
마춘삼이 뒤에서 조용히 말을 얹었다.
"이자강이 명한 대로, 그날 사람들이 다리를 자른 뒤 어르신을 이곳에 버렸습니다."
"버렸다는 게..."
"제련각에서 쫓아냈다는 뜻입니다. 그냥 마을 밖에 내던지듯이요."
말하는 마춘삼의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나중에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그냥 전해들은 사람 같지가 않았다.
"내던지듯이라니, 그게 무슨..."
"어르신을 들쳐업고 나온 것도 아니고, 수레에 짐짝처럼 실어서 마을 어귀에 놓고 갔다고 들었습니다. 그거 주워온 게 저였고요."
손이 떨렸다.
힘을 억지로 조절하지 않으면 방바닥이 갈라질 것 같았다.
실제로 방바닥 나무판자에 손톱 모양으로 살짝 자국이 남는 게 보였다.
아, 이거 진짜 위험하구나.
[진뢰 에너지 축적률 61%. 물리적 발현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 중입니다.]
계산은 나중에 하고, 일단 이 방부터 무너뜨리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억지로 숨을 골랐다.
할아버지가 그런 나를 보며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뜨거웠는지 차가웠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붙잡혔다는 감각만 남았다.
"복수하지 말아라."
"할아버지."
"이자강을 찾아가지 말라는 게 아니야. 하지만 원한만으로 움직이면 너도 나처럼 된다."
말투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절벽만큼 깊었다.
나처럼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불 위에 앉아 다리 없이 웃고 있는 저 모습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재상 자리까지 올랐다가 배신당해 쫓겨난 인생 전체를 말하는 건지 헷갈렸다.
아마 둘 다겠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지금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일단은 다리부터 어떻게 해봐야겠습니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일부러 실용적인 얘기를 꺼냈다.
이럴 때 화제 전환은 내 전문이었다.
슬픈 얘기 오래 붙잡고 있으면 나도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할아버지가 눈을 크게 떴다.
"다리를...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제가 좀 재주가 생겨서요."
[강도윤의 발언 정확도: 매우 낮음. 그러나 방향성은 옳습니다.]
방향성이 옳으면 됐지 정확도가 낮다고 왜 지적을 하는지.
누가 시험 채점하듯이 자꾸 이런 걸 띄우는데, 채점자 성격이 은근히 얄짤없다.
나는 손끝으로 방바닥에 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선을 이어 그리는 것뿐인데도 손이 이상하게 정확하게 움직였다.
다리 관절의 구조, 무릎의 각도, 발목의 회전 범위.
생전 배운 적 없는 지식들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손을 붙잡고 대신 그려주는 느낌이었는데, 뒤를 돌아봐도 아무도 없었다.
촤르르르륵!
바닥에 그려지는 선들이 얇게 빛을 내며 이어졌다.
마춘삼이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기계 의족 설계 도면을 생성합니다.]
[재료: 강철 합금 프레임, 회전축 3개, 하중 분산 스프링]
[예상 완성 시간: 72시간]
72시간이면 사흘.
생각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조선시대 배경에 강철 합금 의족이냐 싶었지만, 이제 와서 이 세계 논리 따지는 것도 의미 없다는 걸 안다.
"이게 뭐냐, 이 그림은."
할아버지가 신기하다는 듯 도면을 들여다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선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짚어보시는 게, 옛날 재상 시절 서류 검토하던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다리 대신 걸어 다닐 수 있게 만드는 물건입니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하냐."
"저도 확신은 없는데, 될 것 같습니다."
확신 없는 말치고는 손이 너무 자신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게 딱 나 같았다.
마춘삼이 옆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련님,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셨습니까. 재주가 이리 늘어서 오셨는데."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정신병자 취급받을 게 뻔했고, 그렇다고 대충 넘기기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이미 정신병자 짓의 결과물이었다.
"멀리서 좀... 오래 있었습니다."
"얼마나 오래요?"
"음, 대충 300년 정도요."
말해놓고도 스스로 어이없었다.
말하면서도 '이걸 누가 믿어'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마춘삼과 할아버지가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300년이요?"
"저도 이상한데, 여기 시간으로는 4년이 지났다고 하더라고요."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때는 무슨, 시차가 이상하게 꼬인 거지.
이건 시간관리 문제라기보다 그냥 우주 버그 아닌가.
할아버지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결국 웃었다.
"손자가 죽었다 살아났는데 나이도 이상하게 됐구나. 좋다, 그것도."
웃는 얼굴에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마춘삼도 옆에서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허... 300년이라니, 그거 참말이면 도련님 얼굴이 이대로인 게 더 신기한 거 아닙니껴."
"제 얼굴이 왜요."
"300년 산 사람 얼굴이 이러면 좀 반칙 아닙니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애매한 말투였는데, 그래도 방 안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은 여전히 뜨겁게 끓고 있었다.
이자강.
그 이름을 되새길수록 손끝에서 이상한 전류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찌릿, 찌릿.
손가락 끝이 저릿할 정도로 반응이 강해지고 있었다.
[진뢰 에너지 축적률 78%. 감정적 자극에 반응하여 상승 중.]
감정에 반응한다는 게, 이거 좀 위험한 능력 아닌가.
누가 이딴 능력을 설계했는지 몰라도 화 잘 내는 사람한테는 절대 주면 안 되는 물건이었다.
근데 그게 나한테 왔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도면을 마무리했다.
"사흘 안에 만들겠습니다. 그동안 좀 쉬고 계세요."
"제련각에서 재료를 구해 오면 되겠는데, 그게 좀..."
마춘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철 합금이라니, 그건 제련각 안에서만 다루는 물건입니다. 일반 마을에선 못 구합니다. 대장간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디, 이 마을엔 그런 것도 없다니께요."
"제련각에 몰래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불가능은 아닌데, 도련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마춘삼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문은 이미 마을에 퍼지기 시작했다.
전대구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그 소문은 더 빠르게 번질 것이다.
누가 봐도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내 사흘짜리 계획보다 빠를 것 같았다.
제련각까지 가는 길이 순탄할 리 없었다.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또 이 구절이냐, 이제 슬슬 다른 것 좀 인용해라.
성경 인용해주는 놈의 레퍼토리가 너무 좁다.
욥기 아니면 전도서, 아주 취향이 확고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고를 웃어넘길 기분이 아니었다.
제련각 안, 익숙했던 그 자리로 다시 걸어 들어갈 생각을 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4년 전 그곳에서 죽었던 놈이 다시 그 문턱을 넘는다.
생각만으로도 뭔가 크게 어긋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할아버지의 다리를 자르라 명한 그 이자강이, 지금 그 안에서 무슨 얼굴로 앉아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의 전류가 다시 찌릿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