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려진 정혼자, 최강귀환

2화

그 빛덩어리는 한참을 지껄이더니, 결국 나한테 필요한 정보는 하나도 안 주고 사라졌다. "CALIBRATING..." 뭘 캘리브레이팅 하는데. 내 인내심을 캘리브레이팅 하는 거야? 빛은 그 뒤로도 몇 번 더 깜빡였다. "CALIBRATING... 87%..." "CALIBRATING... 87%..." "CALIBRATING... 87%..." 야, 이거 로딩바 사기 아니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배달앱 예상 도착 시간이 이런 식으로 안 움직였던가. 분명 20분 남았다고 뜨는데 30분이 지나도 그대로인 거, 딱 그거였다. 반나절이 지났다. 방 안에는 여전히 그 격자무늬 실루엣이 웅웅거리며 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방 안 물건들을 정리했다. 낡은 항아리도 각도 맞춰서 벽에 붙였고, 이불도 네 번 접어서 정확히 각을 맞췄다. 그다음엔 벗어둔 옷가지를 색깔별로 정렬했고, 신발은 코 방향이 문 쪽을 향하도록 나란히 세웠다. 방구석에 굴러다니던 부러진 목검 조각들도 길이 순으로 줄을 세웠다. 할 게 없어지니까 먼지까지 쓸어 담아 각을 잡았다. 손이 심심하면 뭔가를 정렬해야 한다. 지구에서 300년 동안 생긴 버릇인데, 사실은 그전부터도 있었던 것 같다. 강박증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남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저 격자무늬 빛덩어리 말고는 지금 이 방 안에 날 판단할 존재도 없었다. 그때 다시 빛이 응답했다. [SYSTEM CALIBRATION COMPLETE.] [천공(天工). 세계 의지와 천명 규칙의 융합체. 강도윤과의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한국어네. 아까까지 영어 비슷한 걸로 떠들더니, 이제야 좀 알아듣게 말하네. 반나절 동안 뭘 캘리브레이팅 한 건지 몰라도, 최소한 언어팩 하나는 제대로 깐 모양이었다. "...말할 수 있는 거였어?" [YES. LANGUAGE MODULE... 로딩 완료했습니다.] 뭐야, 나 지금 폰 개통하는 기분인데. 통신사 상담원이랑 통화하는 느낌이야. 번호이동 하겠다고 세 시간 기다렸는데 결국 "고객님 확인 중입니다"만 반복하는 그 느낌. 그러다 갑자기 "확인되었습니다"하고 뚝 끝나버리는 것까지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래서, 계약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 [강도윤을 '세계 오염 정화'의 대행자로 임명합니다.] 정화? 오염? 난 지금 세계 회귀한 지 반나절도 안 됐는데 무슨 임명이야. 이건 뭐 신입 사원 첫날부터 발령장 받는 꼴이잖아. 그것도 인사팀 면접 한 번 없이, 근로계약서 조항 한 줄 안 보여주고 사인하라는 거잖아. "나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데." [불가합니다. 강도윤의 천명지체(天命之體)는 이미 세계 규칙에 등록되었습니다.] "등록? 누가 등록했는데, 나 동의한 적 없는데." [동의는 존재 자체로 성립됩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유효했습니다.] 와, 이거 완전 약관 안 읽고 다음 다음 누른 결과가 이거였네. 어디서 정관 몰래 끼워 넣은 조항 발견당한 기분이다. 천명지체. 뭔가 거창한 이름이 붙었다. 무맥이라 무시당하던 몸뚱이가 이제는 '천명지체'라니, 세상 참 아이러니하다. 4년 전 제련각 사람들은 내가 내공 한 줌 못 다룬다고 대놓고 손가락질했다. 그 몸뚱이가 이제 와서 세계 규칙에 등록된 특수 개체라는 소리를 들으니,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사람 팔자 300년 지나면 이렇게 바뀌는구나.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지금 나한테 리워야단을 낚으라는 거야? 아니면 내가 낚인 거야?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쁜 인용이었다. 낚싯대도 없고 미끼도 없는데 리워야단이라니, 그냥 나보고 맨손으로 고래 잡으라는 소리 아니냐. [본 시스템은 강도윤의 오염 정화 임무를 보조하며, 강박적 정리 습관에 대해서도 관찰 데이터를 축적하겠습니다.] "...뭐?" [방금 이불을 네 번 접어 각을 맞추셨습니다. 이는 강박 지수 상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야, 그건 그냥 습관이야." [알겠습니다. 습관으로 기록합니다. 참고로 신발 코 방향 정렬 행위도 함께 기록되었습니다.] "그건 또 언제 봤어." [본 시스템은 계약자의 모든 행동을 관찰 범위에 포함합니다.] 이 시스템, 성격 있는 거 확실하다. 300년 만에 돌아왔는데 잔소리하는 AI를 하나 얻어버렸다. 이럴 거면 그냥 반려동물 앱이나 하나 깔아주지, 뭔 세계 정화씩이나. 밖으로 나갔다. 산길은 익숙했다. 4년 전, 아니 내 시간으로는 300년 전에 뛰어다녔던 그 길이었다. 나뭇잎 색깔도 그대로고, 흙냄새도 그대로였다. 바위 틈에 자라던 이름 모를 들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자라 있었다. 심지어 예전에 발을 헛디뎌 넘어졌던 그 튀어나온 돌부리까지 똑같은 자리에 있었다. [전도서 1:9, 이미 있던 것이라 훗날에 있을 것도 그것이며] 지구에서는 300년이 지났어도, 여긴 그대로구나.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게 이렇게 실감 나긴 처음이었다. 지구에서는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었을 텐데, 여긴 마치 어제 떠났다가 오늘 돌아온 것처럼 멈춰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반갑다기보다는, 뭔가 어긋난 톱니바퀴에 억지로 끼워 맞춰진 느낌이었다. 산을 내려가며 마을이 보였다. 낯익은 지붕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련각 근처 마을, 여기서 자랐고, 여기서 이자강한테 뒤통수를 맞았고, 여기서 떨어졌었다. 저 지붕 밑에서 어린 시절 밥을 얻어먹었고, 저 골목에서 매를 맞았고, 저 우물가에서 처음으로 검을 쥐었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도 발걸음이 여기로 향했다는 게, 나조차도 좀 어이없었다. [강도윤. 마을 접근 시, 신원 노출 확률 78%로 상승합니다.] 78퍼센트? 왜 이렇게 정확한 숫자를 뱉는 거야, 사람 불안하게. 차라리 "위험함" 정도로 대충 말하지, 소수점까지 붙여서 통보하니까 더 쫄리잖아. "어차피 4년 전 얼굴이랑 지금 얼굴이 똑같은데 어떻게 노출을 피해?" [동일 안면 인식 확률 91%. 회피 불가능으로 판단합니다.] "그럼 애초에 왜 확률을 알려주는 거야, 회피 못 하면 그냥 말을 말든가." [정보 제공은 본 시스템의 기본 기능입니다. 불필요하다는 판단은 계약자의 몫입니다.] 말 한번 참 곱게 못 하네. 그런데 그 91퍼센트라는 숫자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는 걸, 나는 마을 입구에 발을 딱 들여놓은 순간 알게 됐다. "...도윤이? 강도윤이여?" 술집 앞에 앉아 낮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가 나를 보고 술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낯익은 얼굴이었다. 전대구. 4년 전 나랑 같이 어울려 다녔던 그 친구, 정확히는 늘 나를 살짝 무시하듯 놀리던 놈이었다.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눈빛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죽은 놈이 뭔 낯짝으로 여길 와 있는겨..." 전대구 눈이 커졌다. 촤악! 술집 안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는 젓가락을 떨어뜨렸고, 누군가는 술잔을 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좁은 술집 안에 정적이 훅 내려앉았다. 좋아, 훌륭하다. 78퍼센트고 91퍼센트고 다 필요 없이, 노출은 5초 안에 끝났다. 숫자로 겁만 잔뜩 줘놓고 실제로는 대책 하나 안 알려준 시스템 이 자식, 이거 완전 보험 설계사 스타일이잖아. "어이, 그거 사람 잘못 본 거 아니냐?" 일단 이렇게 나가야 했다. 증거는 없다. 아직은. 전대구의 눈은 이미 나를 확신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확신에 균열 하나쯤 만들어야 했다. [강도윤. 도주 경로 계산 중...] 젠장, 하필 지금 계산기를 돌려. 등 뒤에서 술집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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