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옥상 문이 벌컥 열렸다.
숨을 몰아쉬며 뛰어든 건, 처음 보는 남자였다.
키가 크고,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대충 걷어 올린 채였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계단을 몇 층이나 뛰어 올라온 게 분명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한설의 앞을 막아섰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다리가 알아서 한설 쪽으로 붙었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그 순간에야 깨달았다.
남자는 숨을 고르며 나를 한 번, 한설을 한 번 번갈아 봤다.
시선이 나를 훑고 지나갈 때,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낯선 사람의 눈빛이란 게 이렇게 무거운 건지 몰랐다.
"한설. 여기 있었네."
한설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늘 무심하던 눈꺼풀이, 아주 잠깐 팽창했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오빠가 여긴 왜."
오빠.
그 단어가 귀에 박혔다.
머릿속에서 그 두 글자가 몇 번이고 되풀이됐다.
한설에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늘 혼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늘 혼자 있어도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남자가 한숨을 쉬며 옥상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교복 치마도 아니고 정장 바지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이 어딘가 낯익어 보였다.
한설이 가끔 벤치 등받이에 몸을 아무렇게나 걸치던 자세와 닮아 있었다.
"학교까지 찾아오게 만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한설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턱 끝이 살짝 들리고, 눈은 옥상 난간 너머 어딘가를 향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뜨는 것도 이상했다.
발끝이 시멘트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그제야 나를 제대로 쳐다봤다.
구두에서 시작된 시선이 교복 위로 천천히 올라와 얼굴에 닿았다.
느릿한 시선이었다.
품평하는 사람 같기도 했고, 그저 낯선 얼굴을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친구가 걔야?"
한설이 짧게 대답했다.
"응."
한 글자였다.
부연도, 설명도 없었다.
그런데 그 한 글자에, 나는 왠지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남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소문대로네."
무슨 소문인지 물을 새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소문. 무슨 소문. 나에 대한 소문이 대체 사촌 오빠라는 사람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였다는 건가.
그럼 한설이 나에 대해서 뭔가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는 뜻인가.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며 말했다.
바지에 묻은 먼지를 대충 두 번 털고는, 다시 한설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한설아, 진짜로. 이번 주 토요일에 집에 안 오면 큰아버지가 직접 오신다고 하셨어."
한설의 얼굴에서 잠깐, 정말 잠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짜증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눈꺼풀이 한 번 떨렸다.
그게 다였다.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는 데는 채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안 가."
짧고 단호했다.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옥상 문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빨랐다.
더 얘기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아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그러다 문 앞에서 다시 나를 돌아봤다.
"너 이름이 뭐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목소리가 먼저 갈라졌다.
"저, 저요?"
"어."
"이, 이도현입니다."
"이도현."
남자가 그 이름을 한 번 곱씹듯 되뇌었다.
혀 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맛보는 것 같은 발음이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쿵.
옥상에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람이 조금 세게 불어와, 한설의 앞머리를 살짝 흩트렸다.
한설은 그걸 정리할 생각도 없이 그냥 서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물어봐도 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촌 오빠."
한설이 짧게 대답했다.
그게 끝이었다.
더 이상 설명은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더 불안했다.
침묵 안에 뭔가가 가득 들어차 있는데, 그게 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집에 안 오면 큰아버지가 직접 온다는 말.
그 말속에 담긴 무게가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설이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평소와는 다른 얼굴을 했다는 것만 알았다.
늘 여유롭던 눈매가 순간적으로 좁아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 미묘한 차이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종이 울렸다.
우리는 각자 교실로 돌아가야 했다.
한설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말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오히려 더 신경 쓰게 만들었다.
그 자리에 잠깐 더 서 있었다.
옥상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도 발걸음을 옮겼다.
-
교실로 돌아오자마자 박준서가 옆으로 다가왔다.
"야, 표정이 왜 그래."
"아니, 그냥···."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잠깐 뜸을 들였다.
박준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얼굴을 살폈다.
"뭔데, 말을 해."
나는 옥상에서 있었던 일을 대충 설명했다.
사복 입은 남자, 사촌 오빠라는 호칭, 큰아버지가 학교까지 찾아온다는 말.
말을 하면 할수록,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지가 새삼 느껴졌다.
박준서의 눈이 커졌다.
"사촌 오빠? 한설 선배한테 사촌 오빠가 있었어?"
"몰랐어?"
"당연히 모르지. 그 선배 가족 얘기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
박준서가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로 아무도 몰라. 담임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어."
김하은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의자를 끌고 와 우리 쪽으로 붙어 앉으면서였다.
"근데 그 사촌 오빠라는 사람, 잘생겼어?"
"그,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중요하지. 궁금하잖아."
김하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물어본 거야."
박준서가 턱을 만지며 진지한 얼굴을 했다.
평소 같으면 실없는 소리를 했을 텐데, 이번엔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근데 진짜 궁금하다. 그 선배 왜 그렇게까지 가족 얘기를 숨기지? 보통 그런 거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김하은이 맞장구를 쳤다.
"숨기는 사람일수록 뭔가 있는 거야. 드라마에서 항상 그렇더라."
나도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물을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물어봤다가 한설이 다시 그 얼굴을 할까 봐 무서웠다.
〈신경 쓰지 마.〉
한설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신경 쓰지 말라는 사람일수록 더 걱정되는 법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박준서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야, 그래서 그 형은 그냥 갔어?"
"어. 문 열고 나가더니 그냥."
"이상한 사람이네. 뭔가 급한 일 있는 사람처럼 뛰어와서는, 몇 마디 하고 그냥 가버리고."
"급한 건 확실히 급해 보였어. 숨도 다 못 고르고 왔잖아."
계단을 몇 층이나 뛰어 올라왔을 그 숨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수업 종이 울렸다.
하지만 나는 칠판이 아니라 창밖만 계속 바라봤다.
선생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멀게 들렸다.
칠판에 뭔가 쓰이는 소리, 분필 긁는 소리, 다 흘러가는 배경음처럼 느껴졌다.
토요일.
한설은 정말 그 집에 가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가지 않는다면, 그 큰아버지라는 사람이 정말 학교까지 찾아올까.
큰아버지가 학교까지 온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도,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잔소리를 좀 심하게 하는 어른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걸까.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상상만 부풀렸다.
옥상에서 봤던 한설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짜증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던 그 표정이, 마음 한구석에 계속 걸렸다.
그게 더 나쁜 습관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릴 때까지도, 나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토요일까지는 아직 나흘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