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청림고 복도는 평소와 다름없이 소란스러웠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빛이 복도 바닥에 긴 줄무늬를 그렸고, 그 위로 학생들의 발소리가 겹겹이 쌓였다. 서은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교실을 향해 걸었는데, 어젯밤의 흔들림은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교복 재킷의 단추를 목까지 잠근 채, 그녀는 늘 그렇듯 시선을 앞으로만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몇몇 아이들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배구부 주장이라는 타이틀이 그녀의 걸음걸이에 어떤 무게를 실어주는지, 서은 자신은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휴대폰이 짧게 울린 건 1교시가 끝난 직후였다. 책상 위에 엎어놓았던 휴대폰이 진동으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 그 작은 떨림에 서은의 손이 먼저 반응했다. 발신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오랜만이다, 강서은.]
서은의 눈이 그 문자에 잠시 멈췄다. 발신 번호 아래, 프로필 사진이 떠 있었는데, 낯익은 얼굴이었다. 짙은 눈썹과 날렵한 턱선, 사진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 얼굴을 서은은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작년까지 청림고 남자배구부에서 뛰었던 선배, 정확히는 도윤이 어깨를 다치기 전까지 함께 코트에 섰던 前 팀 주전 공격수, 이재현이었다.
[너 지역 예선 영상 봤어. 3세트 리시브 패턴 바뀐 거, 그거 누구 아이디어야?]
서은의 손끝이 휴대폰 화면 위에서 멈췄다. 액정 위로 그녀의 그림자가 짧게 드리워졌다.
이재현은 지난 학기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는 소문만 돌았을 뿐, 그 이후로는 학교에서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던 인물이었다. 그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연락을 해온 걸까. 도윤과의 관계도 서은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예전에 도윤의 데이터 노트 한켠에 그 이름이 몇 번 적혀 있었던 걸 우연히 본 기억이 있을 뿐이었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필체, 지우다 만 흔적처럼 남아 있던 그 이름 세 글자가 지금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한도윤이지?]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서은의 심장이 순간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교실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고, 창밖에서 들려오던 새소리도 어느 순간 끊긴 것 같았다.
[걔 요즘도 데이터 만지고 다녀? 세터로는 완전히 접었다던데.]
서은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복도를 걸었는데, 걸음의 속도가 평소보다 조금 빨라졌다는 걸 그녀 자신도 인지하지 못했다. 복도 끝에서 마주친 같은 반 친구가 인사를 건넸지만, 서은은 그저 짧게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쳤다.
수업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서은의 시선은 자꾸 창밖으로 향했다. 운동장 너머로 보이는 체육관 지붕, 그 익숙한 형체가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
체육관 방과 후 훈련 시간, 서은은 도윤을 스탠드 근처에서 발견했다. 여전히 데이터 노트를 들고 벤치 뒤편에 조용히 서 있는 모습, 학교라는 무대 위에서 그는 언제나 존재감 없는 배경으로만 존재했다. 형광등 불빛이 그의 어깨 위로 떨어지며 얇은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그림자는 그가 서 있는 위치보다 늘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서은은 그를 향해 걷지 않았다. 규칙이었으니까. 다만 지나가는 길에 시선을 아주 짧게 던졌을 뿐인데, 도윤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태블릿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 위로 움직이는 숫자들, 리시브 성공률과 세트 타이밍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그의 눈동자 위에 푸르스름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훈련은 평소와 같은 속도로 진행되었다. 공이 네트를 넘어가는 소리, 코트 바닥을 밟는 신발의 마찰음, 코치의 짧은 지시. 그 모든 것이 익숙한 리듬으로 흘러갔지만, 서은의 머릿속 한구석에는 아까 본 문자의 문장들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훈련이 끝난 뒤, 서은은 다시 휴대폰을 확인했다. 새로운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다른 부원들의 발소리를 뒤로하고,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다음 주에 청림고 온다. 친선전으로.]
서은의 손이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만큼 힘이 들어갔다는 걸, 그녀는 잠시 후에야 깨달았다.
[한도윤이랑 다시 얘기하고 싶어서.]
그 문장 아래로 이어진 마지막 줄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걔가 왜 세터 그만뒀는지, 진짜 이유 알아?]
서은은 그 문장을 세 번 다시 읽었다. 도윤에게서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어깨 부상이라는 표면적인 이유 외에는, 그가 왜 그토록 조용히 코트를 떠났는지 그녀는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었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침묵의 선이 두 사람 사이에 이미 그어져 있었던 걸까.
서은은 답장을 쓰려다 지웠다. 세 번, 네 번. 결국 아무 말도 보내지 못한 채 휴대폰 화면을 꺼버렸다.
***
그날 밤, 체육관 뒷문을 여는 서은의 손끝이 평소보다 차가웠다. 문이 열리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텅 빈 체육관 안으로 낮게 퍼졌다. 코트에는 이미 도윤이 서 있었는데, 그의 등 뒤로 떨어지는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잡고 장난이라도 치는 듯, 빛이 미세하게 깜박이며 그의 실루엣을 몇 번이고 지웠다가 다시 그려냈다.
서은은 천천히 코트 안으로 들어섰다. 발소리가 마룻바닥 위에 유독 크게 울렸다.
"오늘 뭔가." 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낮고 건조했다. "표정이 이상해."
서은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그에게 보이지 않은 채 손안에 감췄다. 손바닥으로 액정을 완전히 덮고, 그 위로 손가락을 겹겹이 감싸듯 얹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도윤의 표정에 처음으로 옅은 균열이 스쳤다. 마치 뭔가를 이미 예감한 사람처럼, 혹은 오래전 묻어두었던 이름 하나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걸 느낀 사람처럼. 그의 시선이 서은의 손, 정확히는 그녀가 감추고 있는 휴대폰 쪽으로 잠깐 미끄러졌다가 다시 그녀의 눈으로 돌아왔다.
"거짓말." 도윤이 짧게 말했다. 명령도 아니고 질문도 아닌, 그저 사실을 확인하듯 던지는 어조였다.
서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이 코트 바닥의 라인처럼 선명하게 그어졌다.
멀리서, 체육관 창문을 타고 들어온 밤바람이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그 소리마저 이 순간의 정적을 더 무겁게 만들 뿐이었다.
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동자, 평소보다 조금 더 짙어 보이는 그 색이 서은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손안에 감춰진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