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네 약점, 나만 알아

4화

그날 이후로 서은의 야간 방문이 조금 더 잦아졌다. 정해진 요일이나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체육관 뒷문이 예고 없이 열리는 밤이 늘어갔고, 도윤은 그때마다 별다른 질문 없이 공을 꺼내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로, 도윤은 그날의 컨디션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가벼운 날은 걸음이 빨랐고, 무거운 날은 걸음 사이의 간격이 길어졌다. 그런 식으로 두 사람은 말 없이도 서로의 상태를 읽는 법을 익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부터 평소와 달랐는데, 경첩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속도가 유난히 느렸고, 서은은 코트에 들어서고도 한동안 자리를 잡지 않은 채 벤치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평소의 그녀와는 어긋난 그림이었다. 유니폼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고, 가방도 어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바닥에 툭 떨어뜨려 놓은 상태였다. "연습 안 해?" 도윤이 물었다. "오늘은." 서은이 말끝을 흐렸다. "그냥 앉아 있고 싶어." 도윤은 공을 다시 카트에 넣고 그녀에게서 세 걸음 떨어진 벤치 반대쪽 끝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규칙이었다. 그 거리를 도윤이 먼저 무너뜨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체육관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그 정적을 채웠다.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깜박이고 있었는데, 그 불빛의 주기가 마치 누군가의 숨소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한 밤이었다. 서은은 벤치 위에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유난히 하얗게 굳어 있었고, 손끝은 무릎을 짚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도윤은 그 손을 바라보다가, 뭔가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쪽이 낫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서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전국대회 결승이었어."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세트, 마지막 랠리." 서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내가 스파이크를 쳤는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손끝이 무릎 위에서 옷감을 움켜쥐는 걸 도윤은 놓치지 않았다. 손가락이 옷감을 파고드는 그 힘이, 마치 그날의 기억을 다시 붙잡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네트에 걸렸어. 그것도 완전히, 어이없게. 공이 네트 위에서 잠깐 멈췄다가 그대로 우리 쪽으로 떨어졌어. 그 짧은 순간이, 지금도 눈앞에 그대로 그려져." "그래서." "우리 팀 졌어. 나 때문에." 그 문장 뒤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도윤은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대신 기다렸다. 시계 초침이 열 번쯤 돌아가는 동안, 서은은 숨을 고르는 듯 천천히 호흡했다. "그 다음날 학교 게시판에." 서은이 계속했다. "누가 익명으로 글을 올렸어. '강서은 때문에 우리 학교 우승 놓쳤다'고. 그 글에 댓글이 이백 개가 넘게 달렸어." "..." "처음엔 몇 개 안 되겠지, 생각했는데. 새로고침 할 때마다 숫자가 늘어나 있었어. 오십, 백, 백오십... 그러다 이백이 넘었을 때, 더 이상 세는 걸 그만뒀어." 서은은 그때를 떠올리는 듯 눈을 잠깐 감았다. "난 그날부터 다짐했어.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다고. 완벽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모습, 그걸 벗어나면 안 된다고." 서은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그래서 매일 새벽마다 혼자 체육관에 나와서 스파이크만 연습했어. 몇 백 개씩. 손바닥이 갈라져서 피가 나도 계속. 완벽해지지 않으면, 또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런데 오늘 경기에서. 그 게시판 글이 다시 생각났어.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 그게 그때랑 똑같았어." 도윤은 그 말을 듣는 동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눈동자는 코트 바닥 어딘가를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한 눈빛이었다. "강서은." 도윤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와 다르게, 성이 아닌 이름 전체를 부른 건 처음이었다. 서은이 시선을 들었다. "그날 결승, 스코어 몇이었어." 도윤이 물었다. "24대 26." "세트당 랠리 몇 번이었는지 기억해?" 서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 혼자 그 경기를 진 게 아니야." 도윤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그 안에 담긴 단정함은 흔들림이 없었다. "랠리 하나에 최소 여섯 명이 관여해. 서브, 리시브, 토스, 블로킹, 그 모든 게 다 얽혀서 만들어진 스코어야. 마지막 스파이크 하나로 경기를 정의하는 건, 데이터로 보면 완전히 틀린 방식이야." 서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리시브가 흔들렸으면 토스가 무너져. 토스가 무너지면 스파이크는 애초에 불가능한 각도로 올라와. 네가 친 공이 네트에 걸린 그 순간까지, 최소 다섯 번의 실수가 이미 그 전에 쌓여 있었을 거야. 그건 통계야. 감정이 아니라." "근데 왜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 안 했어."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무너지듯 갈라졌다. "왜, 아무도..."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세 걸음의 거리가 두 걸음으로, 다시 한 걸음으로 좁혀지는 그 순간, 규칙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체육관의 형광등 불빛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가 벤치 위, 서은의 발끝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미안해." 그가 말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더 일찍 말해줬어야 했는데." 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그녀의 눈에 물기가 살짝 어려 있었는데, 그것이 눈물인지 조명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도윤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서은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둘 사이의 침묵이 다시 이어졌지만, 그것은 조금 전의 침묵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그날 밤, 처음으로 규칙보다 가까워졌다. 체육관 시계가 다시 초침 소리를 내기 시작했을 때, 도윤은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 소리가, 지금 이 순간의 거리를 재고 있는 것처럼.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