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숨이 막혔다. 목이 타는데도 물 한 방울 넘길 수 없을 것처럼,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채로 하은이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방 안의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하얬고, 그 하얀 빛 아래서 하은이의 표정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무섭게 만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겨우 그렇게 되묻는 내 목소리는 이미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하은이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다 들었어, 언니. 부엌에서 했던 말부터 다."
그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이어갈 수가 없었고, 그저 다리에 힘이 풀려 문틀을 잡고 서 있어야 했다. 손끝이 문틀의 나뭇결을 파고들 정도로 힘이 들어갔는데도 아프다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장면들이 뒤엉켜 지나갔다. 내가 언제부터, 어떤 순간부터 들킬 만한 소리를 냈던 건지, 며칠 전 밤인지, 지난주였는지, 그마저도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져 정리가 되지 않았다.
방을 나가는 것도, 남아 있는 것도 모두 지옥 같았지만, 나는 결국 아무 말 없이 뒷걸음질치듯 방을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철컥, 하고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세면대를 붙잡은 채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마주하는데, 그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초췌했다. 눈 밑은 퀭했고 입술은 하얗게 말라 있었다.
'들켰다.. 결국 들켰어..'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고,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타일 바닥의 냉기가 허벅지를 타고 올라오는데도 그 차가움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만이 화장실 안을 채우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세듯 세지도 못한 채로 그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삼 년을 도망쳐 다녔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는데, 결국 이렇게 들켜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짓눌렀다. 다른 도시로 옮겨 다니고, 연락을 끊고, 하은이의 삶에서 스스로를 밀어냈던 그 모든 시간들이 결국 아무 소용도 없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하은이를 안전하게 지켜야 할 언니였고, 그 아이에게 있어 가장 믿을 수 있는 어른이어야 했는데, 정작 나는 그 아이를 향해 더럽고 뒤틀린 감정을 품은 채로 이 집에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잘못됐어.. 나는 처음부터 이래서는 안 됐어..'
하는 자책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나는 그대로 숨죽여 울음을 삼켜야 했다. 소리를 내면 하은이가 들을까 봐, 이 좁은 집 안 어디서든 내 울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나는 입을 틀어막고서 어깨만 들썩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앉아 있다가, 문득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 하은이와 같은 공간에, 더는 있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지 정한 것도 아니었지만, 더 이상 이 집에 하은이와 같이 있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옷장을 열고 눈에 보이는 옷가지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 캐리어에 쑤셔 넣는데, 손이 떨려서 지퍼조차 제대로 잠기지 않았다. 화장품 파우치를 챙기다가 그마저도 내려놓고, 통장과 도장이 든 서류봉투만 겨우 찾아 캐리어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짐을 꾸리고 있는데, 방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하는 낮은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돌아보니 하은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방금까지 무표정했던 얼굴은 어느새 조금 창백해져 있었고, 그 아이는 문틀에 한쪽 손을 짚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가려고."
그 목소리에는 원망도, 두려움도 아닌, 그저 조용한 물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차마 하은이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캐리어 손잡이만 붙잡은 채로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는데, 하은이가 방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나한테.. 그런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거, 처음엔 진짜 무서웠어."
하은이의 말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이어지는 말을 들을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처럼 쿵쿵거렸다.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무섭기만 한 건지, 아니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은이는 스스로도 놀란 듯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걸 느끼며 캐리어를 쥔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고, 창문 밖에서 지나가는 차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아니면.. 뭐..'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나는 그 뒷말을 감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은이도 더는 그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저 짧은 정적만이 우리 둘 사이를 채우고 있었을 뿐.
"언니, 오늘은 그냥 나가지 마."
하은이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돌아갔고, 나는 캐리어 앞에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닫힌 문 너머로 하은이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들으면서, 나는 방금 있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환상인지 헷갈릴 정도로 멍했다.
열려 있던 창문 틈으로 밤바람이 스며들어와 방 안을 채웠고, 나는 그 서늘한 공기 속에서 하은이가 남긴 그 말의 여운만을 붙잡은 채,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밤을 홀로 견뎌내고 있었다. 캐리어는 여전히 지퍼가 반쯤 열린 채로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나는 그걸 치울 힘도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기 시작할 때쯤, 나는 그제야 무릎을 세우고 일어나 캐리어를 침대 옆으로 밀어두었다. 오늘은 나가지 말라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결국 짐을 다 풀지도 못한 채로, 나가지도 못한 채로 그 밤을 붙잡혀 있었던 셈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진동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고, 나는 흠칫 놀라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자는 윤지현 선배였다.
[강서윤, 내일 아침에 급하게 얘기할 거 있어. 회사 일이야.]
그 문자를 확인하는 내 손끝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화면 속 짧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실마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회사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급하게 벌어졌다는 건지. 하은이와의 일만으로도 이미 감당하기 힘든데, 이번에는 회사에서마저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건지, 나는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그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잠들지 못하는 또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창밖의 어둠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고, 나는 그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로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