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언니, 그 소리 들었어요

4화

[가장 조용한 밤일수록, 가장 큰 균열이 소리 없이 자라난다.] 그날 밤은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았다. 하은이가 늦게까지 과제를 한다며 방에 불을 켜놓고 있었고,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밀린 서류를 정리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서류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은 채로 그저 종이 위를 눈동자만 흘러 다니고 있었다. 볼펜을 쥔 손끝이 몇 번이나 같은 줄 위에서 멈춰 섰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애써 하은이의 방문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지만,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그 노란 불빛이 자꾸만 시야 가장자리에 걸려 신경을 긁어댔다. 열두 시가 넘어서야 그 불빛이 툭, 하고 꺼지는 걸 확인한 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류를 대충 정리해 치워두고, 씻고 내 방에 들어와 문을 잠갔다. 그날은 유독 참기가 어려웠다. 낮에 하은이와 함께 갔던 카페에서, 하은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입가에 살짝 크림을 묻힌 채로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 얼굴부터가 문제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손끝으로 그 자리를 슥 닦아주었을 뿐인데, 그 순간 하은이의 입술이 손끝에 스치듯 닿았던 감촉이 하루 종일 손끝에 남아 사라지질 않았다.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뉴스를 보는 동안에도, 서류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그 감촉은 마치 화상을 입은 자리처럼 은근하게 남아 나를 괴롭혔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하는 생각으로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침대에 누웠고,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채로 그 감정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로 숨을 죽였지만, 낮은 숨소리는 이미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고, 나는 그 소리가 벽을 넘어 밖으로 새어나갈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낮의 그 장면이 반복해서 재생되었고, 손끝의 감각과 함께 하은이의 이름이 자꾸만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한편 그 시각, 하은이는 잠들지 못한 채 갈증을 느끼며 물을 마시려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고 했다.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로 마루를 밟으며, 혹시라도 내가 깰까 봐 발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걸었다고 했다. 냉장고 문을 열기 전, 거실을 지나던 하은이는 내 방문 아래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발견했고, 동시에 평소와는 다른 낮고 억눌린 숨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잠든 건가 싶어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몇 걸음 더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 소리가 점점 더 뚜렷해지는 걸 느끼며 결국 걸음을 멈춰 세웠다고 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불빛과 함께 들려오는 그 소리는 분명 사람의 숨소리였고, 하은이는 순간 얼어붙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컵의 물이 살짝 흔들려 손등에 튀었는데도 그걸 느낄 새도 없었다고, 나중에 하은이는 그렇게 말했다.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 그냥 지나가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그 짧은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정적 같은 순간에, 하은이의 귀에 낮게 새어나온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하은아.." 탁! 나는 그 순간 내가 무슨 말을 뱉었는지도 모른 채로 정신이 아득해졌고,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는 것도, 내 목소리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대로 새어나갔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그리고 그 순간, 문밖에 서 있던 하은이는 손에 든 컵을 놓칠 뻔한 채로 그대로 몸을 돌려 자기 방으로 도망치듯 뛰어들어갔다고 했다. 복도를 지나 방문을 닫는 소리가 작게 울렸지만, 그 소리조차 나는 듣지 못한 채 그날 밤을 지나 보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고, 프라이팬을 달구는 사이사이에도 어젯밤의 일은 이미 저 멀리 지워진 것처럼,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된장국을 끓이고 밥을 안치며 식탁을 차렸다. 반찬통을 하나씩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면서도, 문득 하은이 방문 쪽으로 시선이 갔지만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늦잠을 자는 거라 여겼을 뿐이었다. "하은아, 밥 먹어야지."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국그릇에 뜨거운 김이 서서히 식어가는 걸 보며 방문 쪽으로 다가가 살짝 열어보니, 하은이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방 안의 커튼도 아직 닫혀 있어 어둑했고, 책상 위에는 어젯밤 하다 만 과제가 그대로 펼쳐진 채였다. "몸 안 좋아? 학교 안 가?" 물어도 그저 작은 목소리로 "괜찮아, 오늘은 그냥 쉴래"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걸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하은이가 감기라도 걸린 줄 알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방으로 들어가 침대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이불을 살짝 걷어보려 손을 뻗는데, 하은이가 갑자기 몸을 돌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붉게 충혈된 눈, 밤새 눌러 참았는지 살짝 부어 있는 눈두덩, 떨리는 입술, 그리고 무언가를 애써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손끝이 이불 끝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것도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언니." 그 한 마디에 실린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걸 느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하은이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알아챈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려 했지만 입술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하은이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어젯밤에.. 언니 방에서.. 내 이름 불렀었잖아." 삑— 그 말이 귀에 닿는 순간, 나는 마치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고,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에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하은이의 이불을 잡고 있던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채로,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목구멍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처럼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하은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고, 그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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