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 사흘이 지났다.
자줏빛 폭풍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박현성이 다시 세운 결계 덕분에 명계는 표면적으로 평온을 되찾았다.
다만 그 평온은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불안한 평온이었다.
발밑이 언제 갈라질지 모르는, 그런 종류의 고요함.
사령부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면 산맥 저편으로 여전히 자줏빛 안개가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안개가 살짝 일렁였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나는 다시 절벽으로 돌아갔다.
매일 새벽, 해가 뜨기도 전에 그곳을 찾았다.
검을 뽑고, 서른두 개의 초식을 반복했다.
한 초식, 한 초식마다 손목의 각도와 발끝의 무게중심을 세심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뭔가 달랐다.
손끝의 감각이, 마음가짐이 미묘하게 변해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귓가에 그날의 소리가 겹쳐 들렸다.
자줏빛 폭풍이 갈라지던 소리.
박현성의 검이 허공을 베어내던 소리.
그리고 그 압도적인 기운 앞에서 내가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
(신부경... 그게 대체 어떤 세계인 걸까.)
서른두 번째 초식을 마치고 검을 거두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장님, 요즘 부쩍 말이 없으세요."
서준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조심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강태오도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털썩, 바위에 걸터앉는 소리가 났다.
"그날 이후로 계속 그러시네요."
나는 검을 내려놓고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산맥 저편, 여전히 자욱한 자줏빛 안개가 걸려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혔다.
"신부경이라는 게, 대체 어떤 경지일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신경 위에 있는 경지잖아. 그 경지에 오르면...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건가."
서준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는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억을 더듬는 표정이었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명계에서 신부경에 이른 이는 총사령관님뿐이라고 들었습니다."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경지라던데요."
태오가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에 은근한 경외감이 묻어났다.
"자질이 특출나야 한다고... 아, 죄송합니다."
태오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자질 이야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오랜 벗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이내 시선을 피했다.
"괜찮아."
나는 짧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온전한 웃음이 아니라는 걸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화신경과 신부경 사이에는, 단순한 수련량으로는 메울 수 없는 벽이 있다고 했다.
타고난 혼백의 그릇, 그것이 결정적인 요소라고.
나는 그 그릇이 작았다.
삼백 년을 갈고닦아도 메워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작음이었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넘치지 않는 작은 항아리처럼.
침묵이 흘렀다.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 세 사람 사이를 채웠다.
그때 서준이 화제를 돌렸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총사령관님을 뵌 적 있으세요? 그날 이후로 통 안 보이시던데."
"아니, 없어."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박현성은 그날 이후 사령부 깊은 곳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매일같이 훈련장을 순시하던 그였는데, 사흘째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할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결계를 다시 세우기 직전, 스치듯 던졌던 그 한마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미묘한 여운이 담겨 있던 목소리였다.
태오와 서준은 곧 각자 임무가 있다며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산길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절벽 위에 앉아 안개 낀 하늘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날 저녁, 나는 홀로 사령부를 찾았다.
석양이 지면서 하늘이 붉게 물들었고, 그 붉음이 산맥 저편의 자줏빛과 뒤섞여 기묘한 색을 만들어냈다.
경비병에게 물으니 박현성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는 유난히 조용했다.
발소리가 벽에 부딪혀 울렸다.
문 앞에 서자 안쪽에서 옅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집무실 안, 박현성은 창가에 서서 자줏빛으로 물든 저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평소보다 왠지 작아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왔느냐."
그가 돌아섰다.
사흘 사이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다.
눈 밑에 그늘이 짙었고, 뺨도 살짝 야위어 보였다.
"그날 결계를 유지하느라 힘을 많이 쓰셨습니까."
"그런 셈이지."
박현성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웃음에도 예전 같은 여유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부른 건 아니다."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형언하기 힘든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도현. 너는 왜 화신경에서 멈춰 있다고 생각하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자질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렇게만 생각하나."
박현성의 눈빛이 깊어졌다.
마치 내 안쪽 어딘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가 보기에 네 노력과 의지는, 이미 신부경에 이른 자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왜 저는..."
"그릇이 다르다는 것, 그건 사실이다."
박현성이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나는 가끔 궁금했다. 그 그릇이라는 것이, 정말로 태어날 때 완전히 정해지는 것인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가슴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너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 같다."
박현성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설명하기 힘든, 하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무언가가."
그 말에 오래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삼백 년 전, 처음 화신경에 올랐을 때 느꼈던 이상한 위화감.
마치 내 안에 나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그런 낯선 감각.
그때는 그저 새로운 경지에 오른 부작용이라 여기고 넘겼었다.
그 감각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아니, 잊으려 애썼다는 것이 정확했다.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고, 다시는 꺼내 보지 않으려 했던 기억.
"총사령관님, 그게 무슨..."
내가 되묻는 순간, 박현성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마치 하려던 말을 삼키듯이.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렸다.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바람 소리만 낮게 들려왔다.
"…아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대신, 며칠 안에 너에게 맡길 일이 하나 있다."
"어떤 일입니까."
박현성이 창밖, 자줏빛으로 물든 저편 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옆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유난히 짙어 보였다.
석양의 마지막 빛이 그의 얼굴 반쪽만을 비추고 있었다.
"명계 깊은 곳에, 오랫동안 봉인되어 온 장소가 있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혈맥신전이라 부르는 곳이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입안에서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어딘가 낯설고, 동시에 어딘가 익숙한 울림이었다.
"그곳에 네가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박현성이 나를 돌아보며 말을 맺었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복잡한 감정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창밖 저편의 자줏빛 안개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