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손바닥에 닿은 돌의 감촉은 차가웠는데, 그 냉기가 순식간에 팔을 타고 어깨까지 번져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몸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자석에 붙은 쇠붙이처럼 손이 제단 표면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이거 손가락이라도 잘라야 떼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마저도 곧 흐릿해졌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온몸의 감각이 지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끝에서부터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 혈관을 타고 흐르던 온기가 순식간에 증발하는 느낌이었다. '이거 죽는 건가.'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리도, 냄새도, 심지어 내가 서 있는지 누워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완전한 무(無)의 상태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딘지 모를 공간에 서 있었다.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떨어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발바닥에 뭔가가 닿는 느낌도 없었다. 마치 진공 속에 붙박인 듯한 기분이었다. 주변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점들이 무수히 떠 있었는데, 그것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천천히 움직이며 나를 둘러쌌다. 어떤 것은 붉은빛을 띠었고, 어떤 것은 푸르게 명멸했으며, 몇몇은 아예 색을 규정할 수 없을 만큼 낯선 빛깔로 흔들렸다. 나는 이게 죽고 나서 보는 환영인지, 아니면 진짜 어떤 초월적 공간에 들어온 건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손을 들어 눈앞의 별빛 하나를 만져보려 했지만, 손가락은 그저 허공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이럴 때 보통 신령님이나 시스템이 나타나서 뭔가 설명해줘야 정상 아닌가. 하다못해 나레이션이라도.' 그런 실없는 기대를 품고 있으려니, 정말로 눈앞의 별빛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어 문자 형태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곳이라니, 이거 상당히 편리한 공간 아닌가.
[각성의 제단이 응답합니다.] [자격을 확인합니다.] [성진지력(星辰之力)의 흔적을 감지했습니다.] [공간법칙(空間法則)의 적합성을 확인했습니다.]
건조하고 사무적인 문구가 눈앞에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는데, 나는 그 문구들을 읽으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성진지력이니 공간법칙이니, 이거 무슨 게임 스킬창 같은 건가.' 나는 대학 시절 고분자공학을 전공했다가 나중에 고문헌 연구로 전공을 바꾼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배운 고대 문자 몇 개가 어렴풋이 이 문구들과 겹쳐 보였다. 특히 성진지력이라는 단어는 어느 낡은 필사본에서 스치듯 본 기억이 있었는데, 당시엔 그냥 도교 계열의 미신적 표현이라 치부하고 넘어갔었다. '그게 진짜였다니, 세상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하지만 그것도 확실한 건 아니었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이 초월적 공간이 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적어도 문구를 보여줄 정도의 배려는 있는 셈이니까.
문구가 사라지고 나자 다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 짧은 침묵 속에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는데, 별빛들이 그리는 궤적이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의 초기 형태처럼 서서히 회전하고 있는 걸 알아챘다. 그 회전은 처음엔 아주 느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설마 저게 나를 향해 좁혀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 무렵, 정말로 별빛들이 다시 소용돌이치며 내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감각은 마치 뜨거운 물을 혈관에 직접 주입하는 것 같았는데,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팔다리가 타는 듯한 통증이 치솟았다가, 곧이어 몸속 깊은 곳에서 낯선 힘이 꿈틀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마치 뱃속에서 뭔가 살아 있는 것이 몸을 뒤집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 낯선 이물감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게 각성이라는 건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눈앞이 흐려지는 걸 참아냈고, 이가 갈릴 정도로 턱에 힘을 주며 버텼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의 통증이었지만, 소리를 내면 뭔가 손해라도 볼 것 같아서 이를 악문 채 숨소리조차 죽였다. 그 순간 다시 문구가 떠올랐다.
[각성이 진행 중입니다.] [경고: 각성에는 대가가 수반됩니다.] [대가의 종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대가라니, 이거 완전 사채 계약서 아니냐. 이자율도 안 알려주고 일단 도장부터 찍으라는 거잖아.' 나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미 뒤로 물러설 방법이 없다는 걸 직감했다. 손을 떼려 해도 떼어지지 않았던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이 계약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뭐,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계약서 조항 따질 처지도 아니지.' 몸속에서 힘이 자리를 잡아가는 감각이 계속되었고, 나는 그 낯선 감각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것이 뼈마디 하나하나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근육이 저절로 움찔거렸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별빛 공간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눈앞의 시야가 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별빛들이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며 눈부시게 폭발하는 장면이었는데, 그 잔상이 눈꺼풀 안쪽에 오래도록 남았다.
정신이 돌아온 건 축축한 흙바닥 위였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온몸이 뻐근한 걸 느끼며 상체를 일으켰는데, 근육 마디마디가 마치 밤새 격렬한 운동을 한 것처럼 저려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데도 뻐근한 통증이 따라붙었고, 목을 돌리자 우두둑 소리가 났다. '살아 있긴 하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고, 표범괴물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늪지대 특유의 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발밑의 흙은 여전히 질척거려서 손을 짚을 때마다 손바닥에 진흙이 눌어붙었다. 나는 손을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몸 상태를 점검했는데, 별다른 외상은 없어 보였다. 다만 몸속 깊은 곳에서 여전히 뭔가 낯선 것이 자리를 잡고 있는 듯한 이질감이 남아 있었다. '이게 아마 그 성진지력인가 뭔가 하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몸을 좀 더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다리가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 대신 저 멀리서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처음엔 벌레 우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처음엔 단순한 배경음처럼 느껴졌던 그 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명확한 방향성을 가지고 커지고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이며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는데, 단일한 개체가 내는 소리라기보다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동시에 진동하며 만들어내는 합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폈고, 늪지대 저편에서 갈색 무언가가 마치 파도처럼 움직이며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걸 목격했다. 처음엔 그저 흙탕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 갈색 물결 자체가 꿈틀거리며 형태를 계속 바꾸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수천, 수만에 이르는 벌레들이 뭉쳐서 만들어낸 거대한 무리였고, 그 규모만으로도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늪지 표면의 갈대와 수풀을 그대로 뒤덮으며 전진하는 그 무리는,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짐승 한 마리가 몸을 뒤채며 기어오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방금 각성했는데 바로 이런 걸 보내주는 건가. 튜토리얼 난이도 설정이 잘못된 거 아니냐.' 나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지만, 다리가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무릎이 절로 후들거렸다. 손끝은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심장은 상황을 자각한 순간부터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요동을 억누르려 숨을 깊게 들이쉬었지만, 코끝으로 훅 밀려드는 습기 가득한 늪지 냄새와 함께 어렴풋이 섞여 오는 낯선 악취가 상황의 심각성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저 갈색 무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얼마나 위험한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나는 다리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이끌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