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웃음소리가 아직 광장에 남아 있었다.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그 소리는 유리 조각처럼 준호의 귓가에 박혔다. 여기저기서 터진 웃음은 순식간에 잦아들었지만, 그의 손등에는 여전히 화끈거리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서아가 쳐낸 손. 그 손이 지금도 저릿했다.
준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발끝부터 시작된 마비는 어느새 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어색하게 느껴졌다.
서아는 이미 몸을 돌려 친구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광장을 가득 채운 다른 학생들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갔다가, 다시 준호에게로 옮겨왔다. 그 시선들이 준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때 다은이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운동화 밑창이 아스팔트를 딛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 야.
서아가 걸음을 멈췄다. 반쯤 돌린 얼굴에는 짜증이 서려 있었다.
— 왜.
—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어?
서아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 뭐가.
—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그렇게 손을 쳐내야 했냐고.
서아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조롱과 무심함이 뒤섞여 있었다.
— 왜 네가 저 애 편을 들어.
다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먹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 준호는 너 좋아한다는 이유로 일 년 넘게 노력했어. 근데 넌 매번 이런 식이잖아.
— 노력? 노력했으면 뭐가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니야?
다은은 잠시 말을 멈췄다. 서아의 말투는 늘 이런 식이었다. 상대의 진심을 저울에 올려 값을 매기는 것 같은 말투. 다은은 그게 오늘 처음으로 낯설게 들렸다. 아니, 낯선 게 아니라 소름이 끼쳤다.
'저 애는 사람의 마음도 성적표처럼 채점하는구나.'
— 최소한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굴욕 줄 필요는 없잖아.
서아는 대답 없이 다은을 잠시 응시했다.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러다 짧게 대답했다.
— 나 갈게.
그녀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발걸음에는 미련도, 죄책감도 없었다. 다은은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뒤늦게 준호를 향해 돌아섰다.
준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시선은 바닥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 준호야.
그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흐렸다.
— 다은아, 괜찮아. 별거 아니야.
— 별거 아니라고?
다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목구멍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걸 삼켜야 했다.
— 사람들 앞에서 그런 취급을 당했는데 별거 아니야?
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을 다시 아래로 떨어뜨렸을 뿐이다. 다은은 한숨을 삼켰다.
'저 자식은 왜 이렇게까지 참는 거야.'
주변에 흩어져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여전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다은은 그 시선들을 하나하나 되받아치듯 매섭게 훑었다. 몇몇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 가자. 여기 더 있을 필요 없어.
다은은 준호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는 저항 없이 끌려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날 이후로 다은은 조용히 움직였다.
배구부 훈련이 끝난 뒤, 부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준호의 이야기를 꺼냈다. 땀에 젖은 유니폼을 갈아입으며 나누는 잡담 사이, 그녀의 말투는 지나가는 듯 가벼웠다.
— 걔 알지, 이준호. 1학년 때 우리 부실 문제 있을 때 나서준 애.
— 어, 기억나. 걔가 그때 선배들한테 대들었잖아.
— 걔가 요즘 좀 힘든 일 겪고 있어. 다들 알아둬.
부원 하나가 물병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 무슨 일인데?
— 자세히는 말 못 해. 근데 걔 그동안 조용히 착하게 지낸 거 다들 알잖아. 억울한 일 당해도 티도 안 내는 애야.
그녀는 굳이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부원들 사이에, 준호에 대한 작은 호의의 씨앗을 심어두었다. 반 친구들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그가 그동안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은근히 흘렸다. 급식실에서, 복도에서, 쉬는 시간 짧은 대화 속에서 한 마디씩.
— 준호 걔, 은근 괜찮은 애더라.
— 맞아. 나도 예전에 도움받은 적 있어.
그런 말들이 작은 파문처럼 번져나갔다. 다은은 그 파문이 퍼지는 걸 멀리서 지켜보았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서아를 욕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균열이었지만, 그 균열은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한편, 준호는 그날 밤 집에서 혼자 그 장면을 되풀이해 떠올렸다. 손등의 화끈거림, 웃음소리, 서아의 차가운 뒷모습. 그리고 그 사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다은의 굳은 얼굴.
방 안의 불은 꺼져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장면은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손을 뻗던 순간, 손끝에 닿았던 서아의 손목, 그리고 그것을 쳐내는 순간의 차가운 눈빛.
'나는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걸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매번 침묵뿐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다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별일 없을 거야.]
준호는 그 문장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별일 없을 거라는 말이, 어쩐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다은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 불빛이 천장에 어른거렸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반 안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져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시작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 조용히 준비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