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한다은은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한 준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지나가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마저 신경을 긁는 것 같았다. 다은은 손안의 것을 꽉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야 깨달았다.
손안의 캔이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그때야 알아차렸다. 손바닥에 남은 캔의 각진 자국이 아렸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쥐고 있었던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저 자식은 대체 왜...'
말이 끝맺어지지 않았다. 다은은 입술을 짓씹었다. 이가 아랫입술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물었다. 서아가 준호의 손을 뿌리치던 순간, 그녀의 눈빛에 스치던 혐오의 표정이 다은의 눈에도 그대로 박혔다. 그건 짧은 순간이었지만, 다은의 기억 속에는 슬로우 모션처럼 늘어져 있었다. 뿌리쳐지는 손, 굳어지는 준호의 어깨,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뜨는 서아의 뒷모습.
'저게 표현이 서툰 거라고?'
다은은 그 말을 속으로 되뇌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다. 그건 명백한 거부였다. 명백한 냉대였다. 그런데 준호는 그 순간에도 웃으며 다시 손을 뻗으려 했었다.
그녀는 나무 그늘에서 걸어 나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준호가 그제야 그녀를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가,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덮였다. 능숙했다. 그 능숙함이 다은의 속을 더 뒤틀리게 만들었다.
— 다은아? 언제부터...
— 방금 왔어.
거짓말이었다. 다은은 태연하게 그의 옆에 앉았다. 벤치는 아직 서아가 앉았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럴 리 없었다.
— 얼굴이 왜 그래.
— 아니야, 괜찮아.
— 안 괜찮아 보이는데.
준호는 억지로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다은은 그 웃음이 얼마나 얇은 껍데기인지 알고 있었다. 1학년 때부터 봐온 웃음이었다. 그가 무시당하고도 웃는 얼굴로 다시 서아에게 다가가는 걸 몇 번이나 봤는지 셀 수도 없었다. 복도에서, 급식실에서, 동아리방 앞에서. 매번 장소는 달랐지만 표정은 늘 같았다.
— 너 진짜 괜찮은 거야?
— 응. 서아가... 원래 좀 그렇잖아. 표현이 서툰 거야.
다은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손안의 뭉개진 캔이 다시 아프게 느껴졌다. 그 통증이 오히려 반가웠다.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
— 서아가...
— 왜.
— 아니, 됐어.
다은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려던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지금 말하면 다 무너져. 아직은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눌렀다. 준호가 지금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그는 서아를 감싸는 쪽으로 결론을 낼 게 뻔했다.
— 그냥,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서.
준호가 눈을 깜빡였다. 그의 눈동자에 잠깐 흔들림이 지나갔다. 마치 다은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의심은 곧 사라졌다.
— 무슨 소리야?
—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다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으면 무언가를 다 쏟아낼 것 같았다. 서아가 어떻게 변했는지, 요즘 어떤 애들과 다니는지, 그리고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부 말해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준호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편의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이 말랐다. 갑자기 갈증이 심하게 몰려왔다. 마치 뭉개진 캔처럼 속이 답답했다. 매장 앞에 서 있는데,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아의 친구들이었다. 유리문 안쪽, 냉장고 진열대 근처에서 두 사람이 음료를 고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얘 진짜 아직도 하고 있대?
— 어. 계속 만나고 있나 봐.
— 웃긴다. 그거 아직도 안 끝났어?
— 하긴, 걘 원래 그런 거 오래 끌잖아. 지겹지도 않나.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가볍고 경쾌한 웃음이었지만 준호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준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거? 뭐가?' 그는 유리문 너머로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이미 자리를 옮겨 사라진 뒤였다. 냉장고 진열대의 불빛만 깜박였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불안한 예감이 명치 아래에서 뭉근하게 올라왔다. 손끝이 저릿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슴께로 가져갔다가, 어색하게 다시 내려놓았다.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나에 대한 얘긴가. 아니면...'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불안했다. 그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저편에서 서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냉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다른 반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완벽한 미소, 흠 없는 걸음걸이.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친구의 말에 맞춰 자연스럽게 터지는 웃음소리. 마치 조금 전 벤치 위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방금까지 얼음장 같던 눈빛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그늘 하나 없었다.
준호는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며 다시 마음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발밑이 꺼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역시 내가 부족한 거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저렇게 웃잖아.'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다독임은 위로가 아니라 채찍질에 가까웠지만, 준호는 그 차이를 구별하려 하지 않았다.
방금 들었던 대화는 어느새 머릿속에서 밀려나 있었다. 서아의 웃는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준호는 결국 편의점 문을 밀고 들어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서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손안에서,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빈손이 천천히 오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