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두 번째 여자친구 선언

3화

며칠이 흘렀다. 준호는 여전히 아침마다 서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대부분 무시당했다. 어쩌다 한 번, 서아가 고개를 까딱이는 정도로 답할 때면 준호는 그날 하루가 다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믿었다. 작은 반응 하나에 온종일이 흔들리는 것. 하지만 그 사이 다은과 마주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매점 앞, 급식실 줄, 방과 후 텅 빈 교실. 다은은 늘 우연을 가장하며 그의 곁을 지켰다. — 오늘도 매점 빵 사러 왔어? — 응. 너도? — 나는 배구부 훈련 전에 뭐 좀 먹으려고. 준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은이 원래 그런 애였다. 붙임성 있고, 여기저기 잘 끼는. 하지만 그날 급식실 줄에서 다은은 평소보다 한 걸음 더 그의 옆으로 붙어 섰다. 어깨가 스칠 듯 말 듯한 거리였다. — 반찬 뭐 나와? — 몰라. 안 봤어. — 넌 먹는 거에 관심이 없어서 그래. 다은이 픽 웃었다. 준호도 따라 웃었다. 별거 아닌 대화였는데, 그 짧은 순간마다 다은의 눈빛은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렇게 그의 곁을 서성이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에서만 오래된 장면을 떠올렸다. '1학년 봄, 부실에서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을 때.' 그때 배구부 선배들이 다은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던 시기가 있었다. 훈련 조에서 빼놓고, 물건을 숨기고, 들으라는 듯 뒷말을 했다. 다은은 그 좁은 부실 안에서 매일 숨을 죽이고 시간을 견뎌야 했다.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담임도, 같은 학년 애들도, 다들 조용히 못 본 척했다. 그날도 그랬다. 부실 문 앞에서 선배 한 명이 다은의 가방을 발로 밀어 넘어뜨렸다. 안에 있던 물병이 굴러 나와 바닥에 물을 쏟았다. 누군가 웃었다. 다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무릎을 굽혀 물건을 주워 담았다. 그때 우연히 부실 앞을 지나던 준호가 그 상황을 보고 나서서 대신 소리를 질렀다. — 야, 뭐하는 거예요!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목소리가 부실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선배들이 순간 당황해서 서로 눈치를 봤다. 준호는 그들과 친한 사이도, 배구부와 얽힌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던 1학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물러서지 않고 다은의 앞을 막아섰다. — 얘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요. 계속 이러면 저 담임한테 다 말할 거예요. 허세였는지, 진심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 선배들은 슬쩍 자리를 피했고, 다은은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로 그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준호는 다은과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다. 나중에 물었을 때 그는 그렇게만 답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그날 이후로 다은의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바뀌었다. 처음엔 고마움이었다. 그저 고마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마움은 다른 감정으로 스며들었다. 다은은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걸 오랫동안 미뤄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뭔가가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다은아. 준호의 목소리에 그녀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 왜. — 요즘 자주 마주치네. — 그냥 우연이야. 다은은 애써 무심한 척 답했다.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이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다짐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로 저 자식 편에 서줘야겠어.' 그녀는 그 다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준호가 서아 앞에서 자꾸 작아지는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그날 부실 앞에서 자신을 지켜준 그 애가, 지금은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다시 주말, 서아와의 세 번째 만남이 잡혔다. 이번엔 학교 축제 준비 기간이라 강당 앞 광장에서였다. 사람이 많았다. 현수막을 다는 애들, 부스 자리를 표시하는 애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시험 방송음까지 온통 소란스러웠다. 준호는 반 아이들 앞에서 서아와 나란히 걸었다. 처음으로 사람들 눈앞에서 함께 있는 자리였다. 그는 며칠 동안 이 순간을 상상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걷는 모습, 누구도 자신들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는 그런 장면을. 그는 이 순간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받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서아는 평소처럼 시큰둥한 얼굴로 걸었지만, 오늘은 적어도 그의 옆에서 걷는 걸 허락했다. 준호는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용기를 냈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서아의 손을 잡으려 했다. — 서아야, 우리... 말을 끝맺기도 전에, 손끝이 그녀의 손등에 닿는 순간, 서아는 손을 확 뿌리쳤다. 그것도 온 힘을 다해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준호의 손이 허공에서 튕겨 나갔다. — 저리 치워. 목소리가 크고 날카로웠다. 광장 전체에 울릴 만큼. 그 순간까지 나름 소란스럽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광장에 있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 너 왜 이렇게 매달려? 사람들 다 보는데. 서아의 눈빛에는 짜증과 경멸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벌레라도 붙은 걸 떼어내는 듯한 표정이었다. 준호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었다. 뻗었던 손이 그대로 허공에 멈춰 있었다.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누군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소곤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누군가 낮게 속삭이는 소리도 들렸다. — 야, 쟤 진짜 불쌍하다. — 저렇게까지 매달리냐. 준호는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손등이 화끈거렸다. 마치 그곳에 낙인이 찍힌 것 같았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아는 이미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다른 반 애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방금 그 일이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 순간, 광장 반대편에서 다은이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부스 설치를 돕다가 우연히 이쪽을 봤을 뿐이었는데, 하필 그 순간을 목격하고 말았다. 서아의 손이 준호의 손을 뿌리치는 그 장면, 그리고 뒤이어 터진 웃음소리, 준호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모습까지. 다은의 두 손이 옆구리에서 서서히 주먹으로 말리고 있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려다 멈췄다. 지금 저기로 걸어가면 무슨 말을 할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더는 저 광경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