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신이 혼약자가 되어달란다

5화

도서실 안,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차은서였다.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에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빛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낯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를 발견한 그녀는 놀란 기색도 없이 그저 옆자리를 손짓으로 가리켰는데,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 태연함이 나를 순간 얼어붙게 만들었다. 어색하게 그 자리에 앉으면서도 나는 그녀가 왜 여기 있는지 물어볼 새도 없이, 책상 위에 펼쳐진 책의 제목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낯선 하드보일드 작가의 이름이었는데, 어딘가 어제 떨어뜨렸던 책들의 목록과 겹쳐 보였다. 우연일까, 아니면 그녀가 일부러 같은 책을 골라 온 걸까. 확신할 수 없어서 나는 그저 책 표지의 낡은 질감을 눈으로 훑으며 침묵을 이어갔다. "자주 오는 곳이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그 안에 묘한 여유가 스며 있었다. "너도 자주 온다며." 누구한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나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고, 나는 그 사실이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동시에 이상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뭘 그렇게 다 알아." 겨우 내뱉은 말에 그녀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 동작 하나에도 여유가 배어 있어서, 나는 스스로가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지를 새삼 깨달았다. "알고 싶은 건 다 알아내." 담담하게 답하는 그 말투에는 조금의 과장도 섞이지 않은 듯했고, 나는 그 단호함 앞에서 왠지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뭐야, 이 사람. "왜 그렇게까지 나한테 관심을 가지는 거야." 결국 참았던 물음이 튀어나왔다. 며칠째 마음속에서 맴돌던 질문이었다. 은서는 잠시 나를 응시했는데, 그 시선이 이번만큼은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창밖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도서실 전체가 완전히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다. "말했잖아. 약속했었다고." 그녀가 다시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난 너를 어제 처음 봤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나를 마주 봤다. 그 시선이 너무 곧아서, 나는 오히려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이상한 불안에 휩싸였다. "넌 기억 못 하겠지."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아주 미세하게 낮아졌다. 확신에서 나온 낮음이 아니라, 어딘가 씁쓸함이 섞인 낮음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되물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의 책을 다시 펼치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손끝으로 책장을 넘기는 그 손짓이 지나치게 느긋해서, 나는 오히려 그 여유가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졌다. "언젠가 말해줄게." 그렇게만 답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럴리가. 내가 저 사람을 어디서 만났다는 거야. 그날 이후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은서가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하지만 분명하게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점심시간이면 같은 시간에 도서실에 나타났고, 방과 후에도 우연을 가장한 듯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흘째가 되던 날 나는 확신했다. 그녀는 절대 우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한번은 매점 앞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는 내가 사려던 음료를 이미 손에 들고 있었다. "이거 좋아하잖아." 짧게 건네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받아들 수밖에 없었는데, 손끝이 스치는 그 짧은 순간에도 이상하게 심장이 저릿하게 울렸다. 나는 매번 거리를 두려 애썼지만, 그녀는 그 거리를 조금씩 좁혀오는 걸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복도에서 지수와 눈이 마주쳤을 때, 지수의 표정에 스치는 미묘한 긴장을 봤다. 지수는 내 옆에 은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안심하는 듯한 얼굴을 보였는데, 그 반응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수가 나를 그렇게 살피듯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 도대체 지수는 은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나를 경계시키려는 걸까. 며칠이 지나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증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오후, 나는 결국 은서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지수가 너 조심하라고 했어." 도서실에서 마주 앉은 채 던진 말에, 은서의 눈빛이 처음으로 날카롭게 변했다. 그 변화가 너무 순식간이어서, 나는 순간 내가 뭔가 건드려서는 안 될 걸 건드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지수가?" 그녀가 되묻는 목소리에서 나는 낯선 긴장을 느꼈다. 평소의 여유로운 말투와는 확연히 다른, 어딘가 예민하게 곤두선 음성이었다. "둘이 아는 사이야?" 내가 다시 묻자, 은서는 잠시 침묵하다가 짧게 답했다. "조금." 그 짧은 대답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숨어 있을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지 더 물으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화제를 돌리고 있었다. "오늘 방과 후에 시간 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왜?" "할 얘기가 있어." 짧고 단호한 말투였는데, 그 안에서 나는 뭔가 중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예감을 느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고, 나는 애써 그 떨림을 감추려 책상 아래로 손을 숨겼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그 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창밖의 하늘이 서서히 붉어지는 걸 바라보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은서가 하려는 말이 무엇일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과 후, 나는 결국 그녀를 따라 학교 뒤편 조용한 정원으로 향했다. 벚꽃이 아직 봉오리 상태였지만, 봄기운이 완연한 공기 속에서 그녀는 나를 향해 돌아서며 처음으로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는데,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유난히 깊어 보였다. "오늘 말해줄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너한테 이러는지." 나는 침을 삼켰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밀려왔고, 손끝이 저릿하게 떨려왔다. 정원의 나무들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고, 나는 그저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렇게까지 심장이 뛸 일인가. "몇 년 전에, 너랑 만난 적 있어." 그녀가 말했다. "핀란드에서." 핀란드라니. 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걸 느꼈다. 나는 핀란드에 가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여권조차 만들어본 적 없는 내가, 도대체 어떻게 그런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걸까. "…무슨 소리야. 나 거기 가본 적 없어." 나는 겨우 입을 열어 반박했지만, 은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 침착함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나에 대해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고, 그 순간 나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한 우연이나 오해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기억 못 하는 게 당연해."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 목소리에 실린 씁쓸함이, 아까보다 훨씬 짙어져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저 사람은 저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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