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신이 혼약자가 되어달란다

2화

손에 남은 책의 무게가 실감으로 다가온 건, 종이 울리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표지에 적힌 낯선 외국 작가의 이름과 그 아래 붙은 도서실 스티커, 손끝에 닿는 종이의 결까지도 전부 낯설게 느껴졌는데, 나는 그 낯섦이 방금 겪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증거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몇 번이나 표지를 뒤집어 확인했다. 형식상 혼약자가 되어달라는 말, 그리고 이미 나랑 약속했었다는 말.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말을 뱉던 차은서의 눈빛만은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 책을 몇 번이나 꺼내 보다가 결국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돌려줘야 한다, 는 생각과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면서, 나는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도대체 왜 나였을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반에서도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조차 희미한 나한테.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걸 두려움이라 부르고 싶지 않아 애써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책을 가방에 넣으면서도 반쯤 자리에 앉은 순간까지도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넘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순간, 복도에서 마주쳤던 그 얼굴이 그대로 걸어 들어오는 걸 보고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차은서였다. 같은 반이었다는 사실을 어제는 왜 몰랐던 건지, 아니 알았어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학교에서 '고독한 여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유명한 존재였지만, 나와는 어차피 다른 세계 사람이라 여겼기에 눈에 담아본 적조차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곧장 내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는 순간, 나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책, 돌려줘." 그녀가 내 책상 앞에 멈춰 서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억양 어딘가에 낯선 리듬이 섞여 있었는데, 그 리듬이 오히려 말의 무게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건네면서도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책상 모서리만 내려다봤다. "어제는… 죄송합니다. 제가 좀 놀라서." 겨우 한마디를 뱉었지만 말끝이 흐려지는 걸 스스로도 느끼며 손끝이 저릿해졌다. 그녀는 책을 받으며 잠시 나를 내려다봤다. 무표정, 그 무표정 속에서도 눈빛만은 이상하게 집요했다. "놀랄 필요 없어." 그녀가 말했다. "제안은 아직 유효해." 그 한마디에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직 유효하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나는 거절했는데, 명백하게 거절했는데. 그런데 왜 저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걸까. "저는 이미 답을 드렸는데요." 겨우 목소리를 다잡아 말했지만, 그녀는 어깨를 살짝 기울이며 짧게 웃음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 웃은 건지 아닌지도 애매한, 그 미세한 표정 변화가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거절은 들었어. 근데 받아들인 적 없어." 그녀의 말투는 단정적이었고, 나는 그 단호함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주변 아이들의 시선이 슬금슬금 이쪽으로 몰리는 걸 느끼면서, 나는 이 상황이 몹시 견디기 힘들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존재감 없이 조용히 지내는 게 내 유일한 생존법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반 전체의 시선이 나에게 꽂혀 있었으니까. 그럴 리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등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걸 느꼈다. "차은서, 자리로 가." 담임의 목소리가 그제야 그 팽팽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녀는 짧게 나를 한번 더 응시하고는 몸을 돌려 자리로 향했는데, 그 뒷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한동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수업이 시작되고도 나는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나한테, 하는 물음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갑갑하게 만들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어제 그녀가 남긴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넌 이미 나랑 약속했었어.' 약속이라니. 나는 그녀를 어제 처음 봤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가능성도 떠올려봤지만 어제 그 눈빛에는 착각이라 부를 만한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조용한 곳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싶었을 뿐인데, 복도 끝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정하준? 걔가 왜?" 누군가 묻는 소리였고, 그 다음 이어지는 대답에 나는 등 뒤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몰라, 근데 차은서가 걔한테 관심 있다는 소문이 벌써 퍼졌어." 낮게 속닥이는 말소리가 이어졌고, 나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멈춰 서서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벌써 소문이 퍼졌다니. 도대체 언제, 어떻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대로라면 조용히 지내려던 내 계획이 통째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명치 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데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나는 낯익은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고, 그 얼굴을 본 순간 온몸의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한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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