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신이 혼약자가 되어달란다

4화

지수가 내 앞에 멈춰 섰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두 다리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침 등교 시간, 교문 앞은 학생들로 붐볐고,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자전거 벨 소리가 뒤섞여 시끄러웠는데, 그 소란 속에서도 그녀와 나 사이에만 이상하게 조용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우리 둘만 다른 시간에 갇힌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이네." 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눌려 있을지, 나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눈은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예전과는 다르게 단단해 보여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 나는 겨우 짧게 대답했는데, 목소리가 떨리는 걸 그녀도 알아챘을 거라 생각하니 손끝이 저릿해졌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지만, 그걸 감추려고 나는 가방끈을 괜히 고쳐 잡았다. 지수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 짧은 순간의 정적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차은서랑 무슨 사이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그건 왜 물어?" 방어적인 말투가 튀어나온 걸 스스로도 느꼈지만 이미 뱉어버린 뒤였다. 지수는 짧게 웃었는데, 그 웃음이 냉소에 가까웠다. 입꼬리만 살짝 올라간, 눈은 웃지 않는 웃음이었다. "소문이 그렇게 퍼졌으니까. 걔가 너한테 관심 있다고." 그녀는 손목에 걸린 시계를 힐끔 보며 말했는데, 그 사소한 동작조차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자연스러웠다. "오해야." 나는 즉시 부정했지만, 지수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해든 아니든, 걔한테 걸리지 마. 좋은 꼴 못 봐." 단정적으로 던지는 그 말에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몇 년째 남처럼 지내다가 갑자기 나서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가능한 건지, 나는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참는다고 참았는데도 손이 저절로 말아쥐어졌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겨우 뱉어낸 말에 지수의 표정이 처음으로 미묘하게 굳었다. 잠깐 정적이 흘렀는데,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나는 왠지 우리 둘 다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내 발끝 근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 중학교 1학년 겨울, 그날. 지수가 나에게 힘든 일이 있다며 도움을 청했던 그날. 눈이 많이 내려서 운동장이 온통 하얗게 덮였던 걸 기억한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하고 물었던 그 목소리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떨리던 어깨, 붉어진 눈가, 나를 붙잡던 손끝의 온도까지도. 그때 나는 겁이 나서, 혹은 스스로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그녀를 외면했다. '나한테 그런 거 기대하지 마.' 라고 말하며 돌아섰던 내 뒷모습이, 여전히 어딘가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몇 번이나 그 장면을 되짚었는지 모른다. 겨울마다, 눈이 내리는 날마다 그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우리는 완전히 갈라졌다. 그녀는 그날 이후 누구에게도 그런 부탁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고, 나는 나 자신을 더 깊이 혐오하게 되었다. 도움조차 청할 수 없게 만든 사람, 그게 나였다는 자각이 오래도록 나를 갉아먹었다. 지수가 다른 사람들과는 웃으며 이야기하면서도 나를 볼 때는 늘 저 단단한 벽 같은 표정을 짓는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해." 나는 결국 그 말을 뱉었다. 몇 년 동안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지수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짧은 동작 하나에 담긴 거절이 너무 분명해서, 나는 숨을 삼켰다. "이제 와서 그런 말 필요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가 나를 더 아프게 찔렀다. "그냥, 걔랑 얽히지 마. 그거면 돼." 말을 마친 지수는 더 이상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돌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교복 재킷 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걸 눈으로 좇으면서도,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사과도 받아주지 않는, 그럼에도 걱정은 해주는 그 이중적인 태도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하는 물음이 가슴속에서 맺혔지만 답을 찾을 방법은 없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곧바로 은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미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유독 오래 머무는 걸 느끼며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심장이 이상하게 조여드는 걸 느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그녀의 옆얼굴에 걸려서, 평소보다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 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드는 소리 사이로 나는 몇 번이나 은서 쪽을 훔쳐봤는데, 그녀는 이미 시선을 거두고 책을 펼치고 있었다. 쉬는 시간, 그녀가 다시 내 자리로 다가왔다.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운 걸음걸이였다. "지수랑 무슨 얘기 했어." 대뜸 질문에 나는 흠칫했다. "봤어?" 되묻는 내 목소리에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문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나는 미묘한 긴장을 읽어냈다. 표정 자체는 여전히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눈빛만은 이전보다 조금 더 예민하게 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냥, 아는 사이야." 나는 최대한 짧게 답하려 했지만, 은서는 그 말로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는 사이 치고는 분위기가 심각했는데." 그녀의 지적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얼마나 지켜본 건지, 그리고 왜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의 손끝이 내 책상 모서리를 살짝 두드리는 걸 보며, 나는 그것이 초조함의 표시라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어." 방어적으로 뱉은 말에, 은서는 처음으로 표정에 옅은 균열을 보였다. 실망인지 불쾌함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 표정이 잠깐 스쳤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알겠어." 짧게 답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걸음이 평소보다 조금 빠르다는 걸, 나는 눈치채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오후, 나는 도서실로 향하며 지수의 말과 은서의 시선을 번갈아 떠올렸다. 걔한테 걸리지 마, 라는 지수의 경고와, 아는 사이 치고는 분위기가 심각했다는 은서의 지적이 자꾸 겹쳐지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복도를 걷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흐렸다. 도대체 이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짐작이 스치는 순간, 도서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나는 그 안에서 뜻밖의 얼굴과 다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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