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자만 남은 세상의 유혹자

4화

오전 8시 30분. 어머니가 내 머리를 묶어주며 물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다섯 살짜리였다. 그 사실이 아직도 낯설었다. 스물여섯 해를 살아온 기억과 다섯 살짜리 몸이 따로 움직이는 느낌. 매일 아침이 그랬다. "어제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 몸으로 산 지 며칠째인데, 어른의 거짓말이 다섯 살짜리 입에서 나오는 게 얼마나 이상한지 나도 안다. "선생님이 전화하셨어. 하은이라는 애 얘기." 손이 멈칫했다. 어머니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 사이에서 잠깐 정지했다. "그 애가 너한테 좀 많이 의지한다고." "...그냥 친구예요."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조심했다. 너무 조심한 게 오히려 어색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잠깐 나를 바라봤다. 거울을 통해서, 눈이 마주쳤다. 뭔가를 더 물으려다 그만뒀다. 그 침묵이 더 무거웠다. 머리끈을 마무리하는 어머니의 손길은 평소와 같았다. "밥 먹고 가자." 그 말이 오늘따라 더 크게 들렸다. 유치원에 도착하자 윤소라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오전 9시 10분.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니, 느껴진다고 생각한 건 나뿐일지도 모른다. 교무실 옆 작은 방. 책상 두 개와 작은 소파 하나뿐인 좁은 공간. 선생님이 무릎을 굽혀 내 눈높이를 맞췄다. "나은아, 하은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물어봐도 돼?" "별거 없었어요. 색연필 주워주고, 밥 나눠 받고." "그게 다야?" "네." 선생님이 미간을 좁혔다. 그 표정을 보는데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어른이 아이의 표정을 읽어내는 방식. 나는 그 방식을 너무 잘 알았다. "어제 하은이 어머니가 전화하셨어. 하은이가 밤에 잠을 안 잤대. 계속 네 이름을 불렀다고." 그 말에 숨이 멎었다. 밤새 이름을 불렀다. 다섯 살 아이가. 색연필 몇 개, 반찬 몇 조각으로 그렇게 됐다. 이게 정상일까. 아니었다. 분명히 아니었다. "밥도 잘 안 먹었대. 너 얘기만 했다고 그러시더라." 선생님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 있었다. 그 걱정이 진짜라는 걸 알겠는데, 동시에 뭔가 다른 것도 섞여 있었다. 그게 뭔지는 그때는 몰랐다. "혹시 너 하은이한테 뭐 특별한 거 해준 거 있어?" "아니요, 정말 별거 아니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대답을 하고 있었다. 별거였다. 분명히 별거였다. 색연필을 주워준 것. 그 손짓 하나가 다섯 살짜리 인생을 흔들었다. 교실로 돌아가는 길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색연필을 주운 것. 밥을 나눠준 것. 버스에서 손을 놓지 않으려 했을 때 억지로 밀어낸 것. 그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하은을 이렇게 만들었다. 이게 뭘까. 나는 뭘까. 스물여섯 해를 살면서 누군가를 도와준 적은 많았다. 버스에서 자리 양보하는 것, 짐 들어주는 것.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주는 것. 길을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것. 그런 것들에 대가가 있었나. 없었다. 그냥 상식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당연히 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 그런데 이 몸에서는, 그 상식이 폭탄이 됐다. 발밑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복도 바닥은 평평했는데, 내 걸음만 자꾸 어긋났다. 교실 문을 열자 하은이 있었다.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눈 밑이 어두웠다. 다크서클이 다섯 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짙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 얼굴은 밝았다. 색연필을 주워줬을 때, 활짝 웃었던 얼굴. 그 얼굴이 지금은 다른 사람 같았다. 나를 보자마자 하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 변화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무서웠다. "나은아." 뛰어오려는 걸 나는 손으로 막았다. "하은아, 잠깐." 하은이 그 자리에 멈췄다. 표정이 다시 무너졌다. 방금 전까지 밝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걸 보는데, 손끝이 차가워졌다. "...왜 그래." "우리 오늘부터 조금 거리를 두자." 그 말을 하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스물여섯 살 어른의 말투로 다섯 살 아이에게 이별 통보를 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나조차 확신이 없었다. 하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왜."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너는 나한테 매혹당한 것 같다, 라는 말을 다섯 살짜리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 말을 한다 해도 하은이 이해할 리도 없었다. "그냥, 다른 친구들이랑도 놀고 그래야 하니까." "싫어." 하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은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재미없어." 그 말이 다섯 살짜리 입에서 나올 문장이 아니었다. 어디서 배운 말투일까. 아니, 배운 게 아니라 진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거였다. 그날 나는 하은을 최대한 피했다. 점심시간에는 다른 자리에 앉았다. 놀이 시간에는 다른 아이들 쪽으로 갔다. 하은은 계속 나를 따라왔다. 내가 자리를 옮기면 하은도 옮겼다. 내가 다른 아이와 이야기하면 하은이 끼어들어 그 아이를 밀어냈다. "너 나은이랑 얘기하지 마." 다섯 살 아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서늘했다. 그 말을 듣는 다른 아이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누군가는 겁을 먹었고, 누군가는 짜증을 냈다. 하은의 세계에서 나 말고 다른 존재는 전부 방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계산했다. 이게 얼마나 더 커질까. 지금 멈추지 않으면 어디까지 갈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후 1시 20분. 미술 시간이었다. 선생님이 색종이를 나눠줬다. 나는 일부러 이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은이 접근하기 어려운 자리였다. 이준은 색종이를 손에 쥐고 짜증스럽게 구겼다. "이거 접기 싫은데." "그냥 접으면 돼. 이렇게." 나는 종이학 접는 법을 보여줬다. 어른의 손놀림으로. 손가락 마디를 접는 순서, 힘을 주는 지점, 그런 것들이 다섯 살짜리 손에서 나오는 게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준이 그 모습을 보고 잠깐 멈췄다. "...너 잘하네." "그냥 하는 거야." 이준의 눈빛에는 하은과는 다른 종류의 관심이 담겨 있었다. 단순한 신기함. 그게 오히려 편했다. 그 순간 하은이 다가왔다. 이준과 나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나은아, 나도 접어줘." "하은아, 옆에 자리 가서 해." "싫어, 여기서 할래." 이준이 밀려나며 짜증을 냈다. "야, 밀지 마." "넌 상관없잖아." 두 아이가 다투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색종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가의 팔꿈치가 책상을 쳤다. 윤소라 선생님이 달려왔다. "둘 다 그만해!" 선생님이 하은을 다른 자리로 데려가려 했다. 하은이 발버둥을 쳤다. "나은이 옆에 있을 거야!" 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다른 아이들이 놀란 얼굴로 이쪽을 쳐다봤다. 몇몇은 자리에서 몸을 움츠렸다. 결국 하은은 억지로 다른 자리에 앉혀졌다.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어깨가 들썩이는 소리가 교실 전체에 퍼졌다. 윤소라 선생님이 그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달랬다. "하은아, 왜 이렇게 나은이한테 집착해." "집착 아니에요." 하은이 눈물 젖은 얼굴로 대답했다. "나은이가 좋은 거예요." 선생님의 손길이 순간 멈췄다.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 표정을 보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선생님도 뭔가를 느끼고 있었다. 하은의 감정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동시에 그 말을 이해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해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그 순간에는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그 표정은 오래 남았다. 오후 4시. 유치원이 끝났다. 오늘은 어머니가 데리러 왔다. 나는 하은과 마주치지 않으려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신발을 신는 손이 평소보다 빨랐다. 윤소라 선생님이 현관까지 배웅을 나왔다. "나은아, 어머님."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은이 일은 저희가 좀 더 지켜볼게요." "네, 부탁드려요."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생활어였다. 걱정과 예의가 섞인, 흔한 어른의 말투. 그러다 선생님을 보는데, 나는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선생님의 시선이 어머니가 아니라 자꾸 나를 향했다. 짧게, 그러나 여러 번. 대화하는 내내 어머니에게 말을 하면서도 눈은 나를 향해 있었다. 그 눈빛이 낯설었다. 하은이 나를 볼 때와 비슷한 종류의 눈빛이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설마, 라는 생각이 스쳤다. 다섯 살 아이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면. 그 생각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 생각을 애써 지웠다. 오늘은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현관문을 나서면서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선생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그런데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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