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여자만 남은 세상의 유혹자

3화

오후 4시 10분. 유치원 마을버스가 도착했다. 노란색 버스였다.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문짝에 붙은 스티커도 반쪽만 남아 있었다. 매일 보는 버스인데 오늘따라 색이 더 진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데리러 오지 못하는 날은 마을버스를 타고 집 근처 정류장까지 갔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침에 전화로 그렇게 말했다. "오늘 늦을 것 같아. 버스 타고 와."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다였다. 버스에 오르자 자리가 절반쯤 비어 있었다. 나는 창가 쪽에 앉았다.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창밖으로 유치원 담벼락이 천천히 지나갔다. 하은이 그 옆에 앉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묻지도 않고. 나는 그 자연스러움에 잠깐 멈칫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자리를 고르는 방식이 아니었다. 이미 정해놓은 것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여기가 자기 자리였던 것처럼. 버스가 출발했다. 엔진 소리가 낮게 울렸다. 바닥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하은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붙어 앉아 있었다. 어깨가 계속 닿았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몸이 살짝 기울었다가 다시 붙었다. 일부러 떨어지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창밖을 봤다. 익숙한 가게들이 지나갔다. 분식점, 문구점, 세탁소. 색연필 사건이 있던 날도 이 길을 지나갔다. 밥을 나눠준 날도, 낮잠 자리를 내준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풍경이었다. "오늘 재밌었어." 하은이 먼저 말을 걸었다. "뭐가." "너랑 같이 있는 거." 간단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투에 무게가 있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의 말투라기엔 지나치게 담담했다. 울지도 웃지도 않고, 그냥 사실을 말하듯 뱉었다. 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하은의 눈을 마주 보기가 불편했다.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그 눈을 오래 보고 있으면 뭔가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버스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정지 시간, 약 40초. 그 짧은 시간 동안 하은이 내 얼굴을 계속 쳐다봤다. 시선이 느껴졌다.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였다. 정확히는 옆얼굴이었지만, 뒤통수까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10초. 20초. 30초. 숫자를 세는 동안에도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봐." "그냥. 보고 싶어서." 다섯 살짜리 입에서 나오기엔 이상한 말이었다. 보고 싶다는 말은, 이미 떨어져 본 사람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럼 하은은 무엇을 보고 싶다고 하는 걸까. 지금 내 옆에 앉아 있으면서, 동시에 나를 그리워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이상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이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하은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아침 낮잠 시간처럼. 이번엔 더 세게 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하은의 손톱이 파고들 만큼. "나은아." "응." "나 너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섯 살 아이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어른의 말투였다. 아니, 어른의 말투보다도 더 절박했다. "...하은아, 우리 오늘 처음 얘기했잖아." "그런데 이상해." 하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고이는데도 흘러내리지 않았다.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안 보면 답답해. 너 보면 좋아. 계속 그래." 답답하다는 말. 좋다는 말. 계속 그렇다는 말. 세 문장이 순서대로 이어졌다. 증상을 나열하는 것 같았다. 마치 몸에 이상이 생긴 사람이 의사에게 설명하듯이.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손바닥에 땀이 났다. 하은이 잡은 손이 뜨거웠다. 버스 창밖으로 익숙한 골목이 지나갔다. 하은의 집 방향은 반대쪽이었다. 그런데 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창밖 표지판을 확인했다. 하은이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가 이미 지나갔다. 분명히 봤다. 그런데 하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은아, 여기 너 내려야 하는 데 아니야?" "나 너 따라갈래." "안 돼. 집에 가야지." "싫어. 너랑 있고 싶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다른 승객들이 이쪽을 쳐다봤다. 앞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힐끗 돌아봤다. 표정에 불편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이 부끄러웠다. 동시에 하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버스 기사가 백미러로 우리를 봤다. "애들아, 무슨 일이야." "아니에요." 나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하은의 손을 잡고 억지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하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일으켜 세우는데도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너 여기서 내려야 해. 안 그러면 엄마가 걱정하셔." 엄마라는 말을 꺼내자 하은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하은의 팔을 잡아끌었다. 정류장에 버스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바깥 공기가 훅 들어왔다. 하은은 내리지 않으려 버텼다. 버스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줬다. "나은아, 내일 또 볼 거지." "응, 유치원에서." "약속." "...약속." 겨우 그 말을 하고 하은을 밀어냈다. 등을 살짝 밀었을 뿐인데도 하은은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마치 그 한마디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하은이 마지못해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하은은 창밖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손을 흔드는 게 아니라, 그냥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표정이 텅 비어 있었다. 뭔가를 빼앗긴 사람의 얼굴이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하은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그런데도 하은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좌석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아직도 조금 빨리 뛰고 있었다. 색연필. 밥. 낮잠 자리. 그리고 지금. 네 가지 사건이 순서대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작은 배려가 하나씩 쌓일 때마다 하은의 반응이 커졌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패턴이 너무 뚜렷했다. 색연필을 나눠줬을 때, 하은은 그냥 웃었다. 밥을 나눠줬을 때, 하은은 내 옆에 붙어 앉았다. 낮잠 자리를 내줬을 때, 하은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지금, 하은은 나를 따라오려 했다. 단계가 하나씩 올라가고 있었다. 마치 정해진 순서를 밟는 것처럼.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계속 그 생각만 했다. 버스 창문에 이마를 대고, 유리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면서도 머릿속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다섯 살 아이의 애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정교했다. 누군가 설계한 것처럼 순서가 딱딱 맞았다. 다음 날, 유치원에 도착하자마자 확인할 게 있었다. 오전 9시 5분. 가방을 사물함에 넣으면서도 머릿속엔 어제 버스 안의 장면이 계속 재생됐다. 하은의 표정, 하은의 목소리, 하은의 손아귀 힘. 교실 문을 열자 하은이 뛰어왔다. 어제보다 더 빨랐다. "나은아!" 하은이 내 목을 끌어안았다. 다섯 살짜리 힘으로 세게. 목이 살짝 조여올 정도였다. "보고 싶었어."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됐다고 하기엔 지나쳤다. 집에서 잠을 자고, 아침을 먹고, 유치원까지 오는 그 몇 시간 동안 하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하은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하은아, 오늘은 다른 친구랑 놀아볼까."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실험이었다. 내가 조금 거리를 두면 반응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싶었다. 잔인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확인이 필요했다. 하은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 무너진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얼굴 전체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일그러졌다. "...왜?" "그냥, 다른 애들이랑도 놀고 그래야지." "싫어." 하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 너랑만 놀고 싶어." "하은아." "싫어, 싫어, 싫어."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는데, 세 번째에서 울음이 섞였다. 다른 아이들이 우리 쪽을 쳐다봤다. 누군가는 소곤거렸다. 누군가는 그냥 신기하다는 듯 구경했다. 윤소라 선생님이 다가왔다. "하은이, 오늘도 왜 그래." 선생님이 하은을 달래려 했다. 하은이 선생님 손을 뿌리쳤다. 작은 몸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었다. "나은이만 있으면 돼요." 선생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의아한 표정. 그런데 그 표정 속에 다른 뭔가가 살짝 섞여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정확히 짚어내지 못했다. 다만 목이 마른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이 나를 보는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관찰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나은아, 하은이랑 무슨 일 있었어?" 선생님이 물었다. "아니요. 그냥 어제 버스에서 같이 왔어요." 사실만 말했다. 그런데 그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무게가 있었다. 선생님도 그걸 느끼는 것 같았다. 그날 하은은 결국 하루 종일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 화장실 갈 때도 따라오려 했다. 선생님이 겨우 막았다. 문 앞에서 하은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이 애정이라기보다는 불안 같았다. 밥을 먹을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놀이를 할 때도 하은의 시선은 계속 나에게 고정돼 있었다. 밥을 먹는 동안 하은은 숟가락을 든 채로 자꾸 나를 힐끗거렸다. 그림을 그릴 때는 자기 도화지보다 내 도화지를 더 오래 쳐다봤다. 놀이 시간에 다른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자고 불러도 하은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건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집착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의존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정확히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오후 4시가 될 때까지 하은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하원 시간이 되어서야 하은은 겨우 내 옆에서 떨어졌다. 어머니가 데리러 온 날이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뒤에서 하은의 시선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안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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