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허가증 사건은 그렇게 대강 정리됐다.
이규석 원장은 다음 회의까지 상세 조사 보고서를 준비하겠다며 물러났다.
그 말을 하는 원장의 표정이 마치 시험 낙제 통지서를 받은 학생 같았다.
'그러게 처음부터 잘하시지.'
박정민 선배는 두어 주 만에 신혼여행을 겨우 다녀올 수 있었다.
결혼식 끝나고 바로 업무에 복귀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면 거의 대현국 관청 역사상 최장기 신혼여행 아니었을까.
"이번엔 진짜 고맙다." 여행에서 돌아온 선배가 선물로 산 떡을 내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떡이 아직 따뜻했다.
포장을 뜯기도 전에 냄새로 알 수 있었다. 팥이 아니라 콩이었다.
"제가 한 게 뭐 있습니까." 나는 떡을 받아 들며 답했다.
"네가 회의에서 시간을 벌어줘서 겨우 짬을 냈지." 선배가 씩 웃었다.
"거기다 원장님 표정 봤냐? 완전 시험 망친 얼굴이더라."
'그건 그쪽도 봤구나.'
동질감이라는 게 이런 데서도 생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조금씩 관청 안에서 존재감이 생겼다.
소문은 좋게도, 나쁘게도 흘렀다.
좋은 쪽은 일 잘하는 신참, 나쁜 쪽은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신참.
둘 다 절반쯤은 맞는 말이었다.
복도를 지나가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이 그 청원서 봤다는 사람이래."
"진짠가? 인장만 보고 알아챘다던데."
"영의정 댁 양자잖아. 뭔가 있는 거 아니야?"
들으려고 들은 게 아니었다.
그냥 대현국 관청 복도가 워낙 좁아서 어쩔 수 없이 다 들렸다.
소문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지, 발보다 빠르다.
업무량이 늘었다.
좌승지가 직접 내게 서류를 맡기는 일이 잦아졌다.
처음엔 단순 문서 정리였는데, 나중엔 지방 청원 검토까지 넘어왔다.
몇몇 상관들은 나를 다른 부서로 데려가려는 눈치까지 보였다.
공조에 있던 판관 하나는 대놓고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이 낭관, 우리 쪽으로 옮길 생각 없나? 자리 하나 비워둘 수 있는데."
"아직 배울 게 많아서요." 나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속으로는 이랬다.
'옮기면 뭐 하러 4년 동안 조용히 지냈나.'
조용히 지내려던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지만, 적어도 4년 동안 쌓아온 신뢰는 이제 값을 발하고 있었다.
'이게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
월급도 조금 올랐다.
액수를 처음 확인했을 때는 진짜로 종이를 두 번 다시 봤다.
숫자가 잘못 찍힌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으니까.
관청 밖 작은 방을 벗어나 조금 더 넓은 곳으로 옮길 여유도 생겼다.
전에 살던 방은 이불 펴면 발이 문틈에 걸리는 크기였는데, 새로 옮긴 곳은 적어도 사람답게 잘 수 있었다.
작은 부엌도 딸려 있어서, 아침마다 물 끓이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꽤 괜찮았다.
안정이라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생각하며 지내는 날들이 잠시 이어졌다.
전생에서 월급 통장 스쳐 지나가는 걸 보며 살던 기억까지 떠오를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거의 인생 역전 수준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래 갈 리가 없지.'
이상하게 그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늘 그렇듯 틀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나는 영의정 저택으로 불려갔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형식적인 자리였다.
양부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서로 안부를 묻는 척하고, 30분쯉 지나면 헤어지는.
감정이 없는 자리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저택 대문을 들어설 때마다 드는 생각은 늘 똑같았다.
'집이 아니라 관청 별관 같단 말이지.'
기둥마다 새겨진 문양도, 마당에 놓인 돌 하나까지도 다 계산된 배치였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명분이 사는 곳 같았다.
영의정은 나를 입양했지만, 그건 계약에 가까웠다.
어린 나를 거둔 이유가 정치적 명분이었다는 걸 안 건 열두 살 때였다.
그날 이후로는 서로 기대하는 게 없었다.
그게 오히려 편했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었으니까.
밥상은 오늘도 과하게 화려했다.
전복죽, 육포, 계절 과일까지.
정작 먹는 사람은 둘 다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요즘 관청에서 이름이 좀 오르내린다더군." 영의정이 무심하게 말했다.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던진 말이었는데, 그 타이밍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별일 아닙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별일 아닌 것치고 좌승지가 직접 서류를 맡긴다던데." 그가 술잔을 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벌써 거기까지 아는 건가.'
며칠 전 일이었다.
좌승지가 나를 따로 불러 서류를 맡긴 게.
그걸 벌써 알고 있다는 건, 이 저택 어딘가에 관청 내부 사정을 실시간으로 보고하는 사람이 최소 한 명은 있다는 뜻이었다.
영의정은 정보력이 좋았다.
아니, 좋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대현국 정치 중추에서 그의 눈과 귀가 미치지 않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됐다.
전생 표현으로 치면, 국정원장 겸 여론조사기관장 겸 사설 정보원 사장을 한 몸에 겸직하고 있는 셈이었다.
"고고학연구원 청원 문제 때문입니다." 나는 사실만 간단히 말했다.
"적막림." 영의정이 그 단어를 곱씹듯 되뇌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평소엔 무슨 얘기를 해도 무덤덤하던 사람이 그 단어에서만큼은 미묘하게 반응했다.
표정 관리라면 이쪽 계통에서 최고 수준일 사람인데, 그런 사람도 완벽하게 감출 수 없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적막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냥 오래된 땅이지."
오래된 땅치고 반응이 너무 빨랐다.
'그냥 오래된 땅이면 그렇게 눈빛 안 흔들리지.'
더 캐물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더 파고들면 오히려 내가 뭔가 알고 있다는 걸 티 내는 꼴이 될 테니까.
나는 젓가락을 다시 들고 아무렇지 않게 육포를 씹었다.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는 예정대로 30분쯉 뒤 끝났다.
영의정은 여느 때처럼 짧게 인사말을 건넸고, 나 역시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 저택을 나섰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마차를 기다리며 저택 뒤편 정원 쪽을 지나는데, 낮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영의정의 목소리였다.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저 시간에 정원에서 누구랑?'
"...그 아이를 지켜보게." 그가 말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밤이라 유난히 잘 들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담벽 쪽에 몸을 붙였다.
심장이 벌써부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 말입니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물었다.
목소리로만 판단하면 나이가 꽤 있는 사람 같았다.
저택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내 양자." 영의정이 답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도현 낭관 말씀이십니까?" 남자가 물었다.
"그래. 최근에 좀 이상한 능력을 보였다더군." 영의정이 낮게 말했다.
"적막림 청원서를 처음 본 순간 인장 문양만 보고 위험을 알아챘다더군. 그것도 확실한 근거 없이."
'그걸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박정민 선배와 나눈 대화는 그날 그 자리, 우리 둘밖에 없었는데.
서류를 넘겨준 사람도, 회의실에 있던 사람도, 그 짧은 순간 내가 인장을 보고 표정이 굳었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없어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이 저택 정원에서, 두 남자가 그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게... 우연 아니겠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우연일 수도 있지." 영의정이 대답했다.
"하지만 만약 그 아이가 정말로 뭔가를 보고 있는 거라면, 그건 아주 오래전에 묻혔던 것과 관련이 있을 거다."
오래전에 묻혔던 것.
그 말이 귓가에 박혀서 떨어지지 않았다.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도 안 끝났는데 갑자기 히든 보스 워프문 열리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내가 직접 그 문 앞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에.
"조용히, 최대한 조심스럽게 살펴보게." 영의정이 덧붙였다.
"그 아이가 알아채지 못하게."
나는 담벽에 등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마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렸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등 뒤 돌벽의 냉기가 옷을 뚫고 들어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온 신경이 정원 쪽 대화에 쏠려 있었다.
남자는 뭔가 더 물으려는 듯했지만, 영의정이 먼저 자리를 뜨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양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겪는 이 이상한 능력을, 그리고 그게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 그는 나를 지켜보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조용히, 내가 알아채지 못하게.
'너무 늦었어요.'
속으로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조용히 담벽을 벗어났다.
마차에 오르는 동안 무릎이 살짝 떨렸다.
마부가 뭐라 인사를 건넸는데, 대답을 제대로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안정됐다고 생각했던 자리가, 사실은 이제 막 흔들리기 시작한 것뿐이라는 걸, 그날 밤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