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또 그 꿈이었다.
칼끝이 가슴을 파고드는 감각까지도 똑같았다.
푹, 하는 소리는 언제나 너무 선명해서 잠에서 깨고도 손끝이 떨렸다.
'몇 번째지, 이게.'
세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세어봐야 좋을 게 없는 숫자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다음엔 늘 웃음이었고, 그 다음엔 늘 배신이었다.
얼굴은 항상 흐릿했다.
마치 안개 낀 창문 너머로 사람을 보는 것처럼, 형체만 있고 세부는 없었다.
[경고: 정신력 -8]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에 저런 글자가 둥둥 떠올랐다.
실제로 보이는 건 아니고... 그냥 느껴지는 거였다.
마치 누군가 두통계에 눈금을 새기고 간 것처럼, 관자놀이 안쪽이 뻐근하게 당겼다.
'이건 또 뭔 병인지.'
어릴 때부터 이랬다.
의원들도 원인을 못 찾았고, 나중에는 그냥 포기하고 살았다.
악몽이야 다들 꾸는 거 아니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그냥 웃고 넘겼다.
다들 꾸는 악몽이 매일 밤 똑같은 방식으로 나를 죽이는 건 아닐 텐데.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했다.
방 안 공기가 서늘했다.
이 시간에 눈을 뜨는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
세숫대에 물을 받아 얼굴을 씻는데, 대야 표면에 비친 내 낯짝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눈 밑이 시퍼렜다.
'꼭 밤새 노름하다 온 놈처럼 생겼네.'
물기를 닦아내며 벽에 걸린 관복을 내려다봤다.
오늘도 저걸 입고 저 문서 더미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적어도, 밤마다 죽는 것보단.
옷을 걸치고 방을 나서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도 지각은 아니겠지.
*
"이도현."
출근길, 관청 정문 앞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불렀다.
박정민 선배였다.
2년 차 차이인데도 늘 갓 부임한 신참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하고 다니는 사람.
저 웃음만 보면 세상 걱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은데, 실은 관청에서 제일 걱정 많은 인간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얼굴이 왜 그래, 또 밤새 뭐 했어?" 그가 물었다.
"잠을 좀 설쳤습니다." 나는 짧게 답했다.
'악몽 때문이라고 하면 또 걱정할 텐데.'
선배는 걱정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다.
걱정을 잘한다는 건 좋게 말하면 정 많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었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어제 마무리한 세곡 문서, 정승 어른이 칭찬하셨어." 그가 어깨를 툭 쳤다.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실력이 아니라 운이라고 하는 게 편했다.
칭찬받는 건 늘 부담스러웠다.
칭찬을 받으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 기억하면 궁금해하고, 궁금해하면 캐묻는다.
캐물어봐야 나올 게 없는데도, 사람들은 늘 뭔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운이 좋다는 말도 벌써 몇 번째냐." 선배가 피식 웃으며 앞서 걸었다.
"넌 진짜 운으로 4년 버틴 거면, 나라 팔자가 어지간히 좋은가 보다."
'팔자는 무슨. 그냥 조심하는 것뿐인데.'
속으로만 대꾸하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의정부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먹과 종이, 그리고 사람들의 한숨이 뒤섞인 냄새.
이곳에서 4년을 일했다.
열여덟에 졸업하고 곧바로 들어와 벌써 4년째, 이제는 익숙하다는 말도 지겨울 지경이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다른 서리들이 눈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때마다 적당히 고개를 숙이고, 적당히 웃었다.
너무 웃으면 이상하고, 안 웃으면 또 이상한 자리다.
이런 균형 잡기도 벌써 습관이 됐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펼쳤다.
밤새 두통이 남아 있어서인지 글자가 살짝 흔들려 보였다.
[정신력 저하 상태 유지 중 — 오차 발생 확률 상승]
'알아, 알아. 안 그래도 조심하고 있어.'
속으로 대꾸하며 서류를 다시 읽었다.
숫자 하나를 두 번 확인하는 버릇이 생긴 지도 오래됐다.
악몽을 꾼 다음 날은 특히 더 그랬다.
실수가 잦아지고, 판단이 반박 걸음 늦어진다.
남들은 그냥 잠을 못 자서 그런 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알았다.
이건 그냥 잠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먹을 갈면서도 손끝이 살짝 떨렸다.
'오늘은 좀 심하네.'
붓을 쥐고도 한동안 글자를 못 쓰다가, 겨우 첫 획을 그었다.
옆자리 서리가 나를 힐끗 보더니 다시 자기 서류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아무도 캐묻지 않았다.
이 관청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다들 자기 서류에 파묻혀서 남 사정에 관심 둘 여력이 없다는 거였다.
오전 내내 나는 세 번이나 같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숫자 하나가 자꾸 두 개로 겹쳐 보이는 느낌이었다.
'정신 차려. 이거 틀리면 또 위에서 불려간다.'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 서류를 마무리했다.
붓을 내려놓았을 때는 이미 어깨가 뻐근했다.
오전 업무가 끝나갈 무렵, 박정민 선배가 낑낑대며 서류함을 들고 왔다.
표정이 벌써 반쯉 죽어 있었다.
"이거... 또 왔어." 그가 서류함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쿵, 소리가 제법 묵직했다.
서류함 무게가 그의 마음의 무게랑 비슷한 모양이었다.
"고고학연구원에서요?" 나는 물었다.
"응. 세 번째야, 이번 달만." 그가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가 어찌나 깊은지, 옆에서 듣던 내가 대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고고학연구원.
이름만 들어도 관청 사람들 미간이 좁아지는 곳이었다.
적막림에서 멸망한 왕국의 유적을 파겠다며 몇 년째 예산과 허가를 조르는 기관.
적막림은 국가가 지정한 금지구역이었다.
이유는 명확하게 알려진 게 없었다.
그냥 '위험하다'는 말 한마디로 몇 대에 걸쳐 봉인된 땅이었다.
어릴 때 들었던 이야기로는, 그 숲에 들어간 사람 중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람이 없다고 했다.
물론 그런 소문은 보통 반쯤 허풍이지만, 반쯤은 또 진짜인 경우가 많았다.
"이번엔 뭘 요청했습니까?" 나는 물었다.
"특별출입허가증."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엔 아예 정식으로 통과시켜달래. 원장이 직접 왔었어."
"원장이 직접요?" 나는 되물었다.
"어. 아침부터 대감 문 앞에서 두 시간을 버텼대. 결국 문전박대당하고 우리한테 서류만 던지고 갔어."
그럼 그렇지.
저 사람들은 포기를 모르는 게 특기였다.
"매번 이렇게 반려당하는데, 왜 자꾸 시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중얼거렸다.
"학자들이 다 그렇지. 뭐 하나 파고들면 죽어도 놓지를 않아."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그 근성 참, 어디다 쓰면 좋을 텐데.'
서류함 맨 위에 놓인 청원서를 슬쩍 들여다봤다.
두꺼운 종이에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고고학연구원의 관인이었다.
인장 아래로 몇 줄, 원장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이는 절박한 문장들이 이어져 있었다.
'이번 발굴로 국가의 기원을 다시 쓸 수 있다', '허가만 내려주신다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 같은 말들.
익숙한 문구였다.
이런 청원서는 거의 매번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이런 식으로 끝난다.
그런데.
순간, 뭔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감각이었다.
악몽 속에서 느꼈던 그 감각과 비슷했다.
'이게 뭐지.'
인장의 문양을 다시 봤다.
나선형으로 얽힌 세 개의 선.
그냥 관인일 뿐인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눈을 뜬 세상에서 처음 보는 물건이었는데도, 어딘가 익숙했다.
숨이 살짝 가빠졌다.
주변 소리가 갑자기 멀게 들렸다.
박정민 선배가 뭔가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무슨 내용인지 귀에 잡히지 않았다.
시선은 그저 그 나선형 문양에 못 박혀 있었다.
[기억 잔재 감지 — 일치도 확인 중...]
머릿속에서 그 문구가 뜨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악몽은 밤에만 오는 거였는데.
'왜, 하필 지금.'
손끝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두통 때문이 아니었다.
인장 위의 세 개 선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눈앞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설마.'
목구멍이 바짝 말랐다.
"도현아?" 박정민 선배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래, 갑자기 얼굴이 하얘졌는데."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그 문구가 깜빡이고 있었다.
[일치도 확인 중...]
'확인 중이라니, 대체 뭐랑 일치한다는 거야.'
청원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 끝이 살짝 구겨졌다.
그 순간,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머릿속에서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일치도 78% — 근원 추적 가능]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