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이런 게 있었다.
악몽이 시작된 게 몇 살 때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세 부 넘게 반복됐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세 부.
일 년 열두 달, 그중에서도 유독 뒤숭숭한 계절마다 한 번씩.
계산해보면 백 번은 훌쩍 넘는 횟수였다.
'인생 최고 스트리밍 콘텐츠네, 이거.'
농담으로 넘기려 했지만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항상 같은 결말이었다.
나는 죽는다.
칼에 찔리거나, 목이 졸리거나, 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
어느 날은 등 뒤에서 날아온 칼날에, 어느 날은 물속에서 숨이 끊겼고, 또 어느 날은 그냥 눈을 감았는데 다시는 뜨지 못했다.
매번 다른 방식으로 죽으면서도 지겹도록 익숙한 감각이 있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 항상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믿었는데."
낮고 다정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원망도, 분노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냥 슬픔뿐이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은 흐릿하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목소리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흐릿한 안개 속에 있는 느낌.
하지만 그 감정만은 뚜렷했다.
배신당했다는 감각, 그리고 그 배신을 저지른 게 다름 아닌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이라는 확신.
'대체 누구야, 넌.'
답 없는 물음을 던진 게 벌써 몇 백 번째인지.
어릴 때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엄마를 불렀고, 커서는 그냥 벽을 보고 한숨을 쉬는 걸로 대신했다.
사람은 성장한다지만, 악몽 앞에서는 결국 다 똑같았다.
*
서류함에 놓인 청원서를 다시 들여다봤다.
붉은 인장, 나선형 문양.
다시 봐도 그냥 관인이었다.
관청에서 하루에도 수십 장씩 도장을 찍어대는, 그 흔하고 평범한 인장.
하지만 조금 전 스쳤던 그 감각은 착각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생생했다.
손끝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소름이 훑고 지나갔던, 그 명확한 감각.
[정신력 소모 상태 — 반복 접촉 시 위험도 상승]
또 저 문구가 떠올랐다.
이건 뭐, 게임하다 체력 게이지 깎이는 걸 알림으로 받는 기분이었다.
다만 여긴 게임이 아니고, 죽으면 진짜 죽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세이브 파일도 없었다.
리트라이 버튼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고.
"뭘 그렇게 봐?" 박정민 선배가 내 어깨 너머로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커피 냄새가 먼저 훅 끼쳤다.
아침부터 세 잔째 마시는 게 분명했다.
"인장 문양이 좀 특이하네요."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고고학연구원 인장이 다 그래. 옛날식이라 그런가." 선배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선배는 그러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나만 이상하게 반응하고 있는 거였다.
'옛날식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그냥 잠을 못 자서 헛것을 보는 걸지도 몰랐다.
수면 부족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든다는 건 어디서나 하는 얘기니까.
하지만 곱씹어보니 이상한 게 하나 있었다.
악몽 속에서 배신자의 얼굴은 늘 흐릿했지만, 그 사람이 지니고 있던 물건 몇 개는 항상 명확했다.
반지, 문양이 새겨진 허리띠, 그리고 저 나선형 세 개의 선.
처음에는 그냥 꿈에서 자주 나오는 무늬려니 했다.
어릴 때는 그게 그냥 내 상상력의 한계려니 생각했다.
사람이 꿈을 꿀 때 몇 가지 이미지만 반복해서 재활용한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적도 있었고.
그런데 지금, 현실에서 똑같은 문양을 마주하고 보니 소름이 돋았다.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구체적이었다.
'이게 우연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확률을 따지는 건 내 오랜 버릇이었다.
관료 일을 하다 보면 확률을 따지는 게 습관이 된다.
숫자로 안 되는 건 세상에 별로 없었다.
아무리 복잡한 사건도 결국 변수를 나열하고 계산하면 답이 나온다는 걸, 나는 이 일을 하면서 배웠다.
그런데 이번 건 숫자로 안 됐다.
*
집에 돌아와서도 그 문양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씻으면서도, 심지어 텔레비전을 틀어놓고도 눈에 들어오는 건 나선형 세 개의 선뿐이었다.
결국 나는 오래된 서랍을 뒤졌다.
서랍 안쪽, 옷가지 밑에 숨겨둔 낡은 노트가 있었다.
표지가 다 닳아서 모서리가 둥글게 말려 있는, 초등학생 때 쓰던 것으로 보이는 노트.
어릴 때부터 악몽을 꾸고 나면 습관적으로 기록해 둔 노트였다.
남들이 보면 이상한 애 취급했을 것 같아서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노트였다.
친구들에게 어젯밤 꿈 얘기를 하면 다들 재밌다는 반응이었지만, 내 꿈은 재밌다기보다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그냥 조용히 혼자 적기만 했다.
노트를 펼치자 삐뚤빼뚤한 어릴 적 글씨부터 최근의 정갈한 글씨까지, 4년 넘게 쌓인 기록이 나왔다.
초반 몇 장은 그냥 "무서웠다", "칼에 찔렸다" 같은 단순한 문장뿐이었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기록이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죽는 방식, 배경, 상대의 목소리, 그리고 그 사람이 지녔던 물건.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손끝이 떨렸다.
'세 개의 나선.'
최근 다섯 번의 기록에서 세 번이나 언급되어 있었다.
나머지 두 번은 아마 내가 그 물건을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기록을 빠뜨렸을 확률이 높았다.
[규칙 확인: 특정 상징이 3회 이상 중복 노출 — 신뢰도 상승]
이런 게 진짜 있을 줄이야.
어릴 때는 그냥 반복되는 게 지겨워서 짜증만 났는데, 지금 보니 이건 그냥 트라우마가 아니었다.
뭔가 규칙이 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설계한 것처럼, 반복되는 요소들이 하나의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페널티도 명확했다.
악몽을 꾼 날은 하루 종일 두통과 판단력 저하가 따라왔다.
집중이 안 되고, 글자가 흔들리고, 사람들의 말이 한 박자 늦게 들렸다.
회의 중에 자꾸 딴생각을 하다가 상사한테 지적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낮에도 그 여파가 이어지는 날은, 뭔가와 마주쳤을 때 소름이 돋는 식으로 경고가 왔다.
'그럼 이건 그냥 페널티만 있는 게 아니라, 뭔가 이용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 생각이 들자마자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관료 일을 하면서는 좀처럼 느낄 일이 없는, 순수한 흥미.
서류에 도장 찍고 회의 참석하고 보고서 작성하는 일상 속에서, 이런 종류의 두근거림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낯설었다.
'이거 완전 미스터리 소설 주인공 된 기분인데.'
물론 주인공이 되는 건 좋은데, 죽는 것도 매번 나라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반복되는 악몽이라도, 죽는 그 순간의 감각은 매번 생생했다.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흐려지고, 마지막으로 그 목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까지.
그건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
다음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관청에 나갔다.
아직 사람들이 거의 없는 시간이라 사무실이 유난히 조용했다.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소리와 내 발소리만 복도에 울렸다.
서류함에 있는 청원서를 다시 꺼내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고고학연구원장 이규석이 직접 서명한 문서였다.
적막림 안쪽, 이른바 '중심 유적지'에 대한 접근 허가를 요청하는 내용.
문서 자체는 형식적이었다.
발굴 목적, 예상 기간, 필요 인력, 그런 것들이 딱딱한 관공서식 문체로 나열돼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아무 문제 없는 평범한 행정 문서였다.
중심 유적지.
그 표현이 눈에 걸렸다.
지금까지 요청은 항상 외곽 지역에 한정됐는데, 이번엔 처음으로 중심부를 언급했다.
내가 이 부서에서 이런 청원서를 처리한 게 벌써 이 년째였다.
그동안 봐온 문서들 중에 '중심 유적지'라는 표현이 들어간 건 이게 처음이었다.
'이게 그냥 유적 발굴 욕심일까, 아니면.'
이규석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확신이 없다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문서 하단에 찍힌 붉은 인장을 다시 한번 손끝으로 스쳤다.
이번에도 그 감각이 왔다.
소름, 그리고 짧은 순간 스치는 낯선 기시감.
나는 이 사건을 파헤쳐 보기로 했다.
악몽에서 얻은 단서를 확인할 방법이 이거밖에 없어서였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책상 위 청원서를 다시 서류함에 넣으며, 나는 이규석이라는 이름을 수첩 한 귀퉁이에 조용히 적어두었다.
아직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얼마나 큰 문제로 이어질지도 전혀 알지 못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