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쪽지를 손에 든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방 안의 불빛 아래서, 종이가 살짝 떨렸다. 내 손이 떨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필체를 다시 봤다. 곧 다시 갈게, 라는 문구가 자꾸 눈에 밟혔다.
글씨체는 또박또박했다. 서두른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치 자기가 언제든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문을 잠갔다. 두 번 확인했다.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봤다. 덜컹거리지 않았다.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창문도 확인했다. 커튼을 쳤다. 방 불을 껐다가 다시 켰다.
이상하게 이 짓을 세 번쯤 반복했다.
밤이 깊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목에 있는 상처를 손으로 계속 만졌다.
울퉁불퉁한 흉터의 결이 손끝에 그대로 느껴졌다. 아물었는데도 왜 아직 뜨거운 느낌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의사는 사고로 생긴 상처라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서다인은 여자친구라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학교의 아무도 서다인을 몰랐다.
그런데 서다인은 실재했다.
어제 분명히 내 앞에 서 있었고, 웃었고, 목소리를 냈다.
모순이 계속 쌓였다.
쌓이다 못해 머릿속에서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잠들었다.
꿈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뭔가 거대한 것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느낌만 남았다.
다음날 등굣길, 골목을 돌아나가자 서다인이 서 있었다.
교복 재킷 위로 아침 햇살이 얇게 걸려 있었다. 그 뒤로 골목 담벼락의 낙서들이 무의미하게 이어졌다.
"잘 잤어?"
웃으면서 다가왔다. 어제와 똑같은 미소였다.
소름 돋게 똑같았다. 각도까지 재현한 것처럼.
"쪽지 봤어요."
그녀의 미소가 잠깐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봤다.
"우리 집에 어떻게 들어왔어요?"
"들어간 적 없는데. 그냥 문틈에 끼워놨어."
대답이 너무 빨랐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답이 나왔다.
"제가 학교에서 뭘 물어봤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음, 그냥 감이랄까."
감이라니. 담임에게 서다인의 존재를 확인한 걸 감으로 알 수는 없었다.
사람이 감으로 알 수 있는 범주에는 한계가 있다. 이건 그 한계를 아득히 넘어섰다.
"학교에는 서다인이라는 학생이 없다던데요."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미묘하게 느렸다. 마치 대답을 조립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당연하지, 전학 절차가 좀 복잡해서."
"학생부에 이름 자체가 없대요."
"관료제가 원래 느려. 신경 쓰지 마."
너무 매끄러운 대답이었다. 마치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아니, 준비했다기보다는 이미 백 번쯤 해본 대답 같았다.
"준혁이도 당신을 모른대요."
그 이름이 나오자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짜로 흔들렸다.
가면 밑에 있던 뭔가가 순간 삐끗한 느낌이었다.
"박준혁?"
"네, 제 친구요."
"...그 사람이 아직 있어?"
이상한 질문이었다.
아직 있어, 라니.
마치 없어질 수도 있었다는 것처럼.
사람이 존재하고 안 하고를 이런 식으로 묻는 게 정상은 아니었다.
"당연히 있죠.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래요."
서다인이 잠깐 시선을 피했다.
발끝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허공 어딘가를 봤다. 마치 거기 뭔가 적혀 있는 걸 읽는 것처럼.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중요한 건 우리야."
또 화제를 돌렸다.
능숙했다. 너무 능숙했다.
이 사람은 대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꺾는 데에 도가 튼 것 같았다.
"저는 이해가 안 가요. 아무도 당신을 몰라요. 그런데 저희는 사귄대요. 말이 안 되잖아요."
그녀가 잠깐 나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는 뭔가 안타까움 비슷한 게 섞여 있었다. 착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진태야, 넌 원래 이런 걸 다 이해할 필요 없었어."
"원래라니요."
"...아무것도 아니야."
"자꾸 알 것 같은 말을 하다가 멈추는데, 뭔가 알고 있으면 말해줘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진짜 한숨이었다.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피곤한 사람이 내는 소리였다.
"오늘 방과 후에 시간 있어?"
"왜요."
"보여줄 게 있어."
"뭘요."
"입체기동 장치."
낯선 단어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입체와 기동과 장치. 세 단어가 붙어 있는데 각각은 알아도 셋이 붙으니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됐다.
"뭐라고요?"
"아, 신경 쓰지 마. 그냥 개인적인 용어야."
"입체기동 장치가 뭔데요?"
"운동기구 같은 거야."
너무 성의 없는 설명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저건 초등학생도 안 속을 변명이었다.
"운동기구 이름이 입체기동 장치예요?"
"응."
거짓말이라는 게 너무 뻔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상한 단어를 굳이 입에 담았을까.
실수로 나온 말 같았다.
마치 원래 쓰던 단어를 습관적으로 내뱉었다가 뒤늦게 아차 싶어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초경질 블레이드도 있는데."
그녀가 이번에는 아예 말을 삼켰다.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방금까지 그럭저럭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그건 그냥 잊어."
"뭔데요 그게."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닌데 왜 그렇게 표정이 굳어요."
그녀가 억지로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진태야, 지금은 그냥 나 믿고 따라와줄 수 있어?"
"믿을 만한 이유를 하나도 안 줬는데요."
"..."
짧은 정적이었다.
골목의 바람 소리만 들렸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학교 가야지."
그녀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뒷모습을 보며, 어제처럼 그녀의 걸음걸이가 이상하다는 걸 다시 눈치챘다.
지면에 닿는 시간이 이상하게 짧았다. 마치 몸이 실제보다 가벼운 것처럼.
발을 딛는 순간과 다음 발을 딛는 순간 사이, 그 텅 빈 시간이 사람의 걸음이라기엔 너무 길었다.
입체기동 장치, 초경질 블레이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인데,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 같은 기묘한 기시감이 스쳤다.
마치 잊은 기억 속 어딘가에 이 단어들이 이미 있었던 것처럼.
머리 한 구석이 간지러운데 긁을 수가 없는 느낌이었다.
교실로 향하는 길, 박준혁을 만났다.
계단에서 마주쳤다. 준혁은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오다 나를 보고 멈췄다.
"어제 그 여자 또 만났어?"
"응, 방금."
"뭐래?"
"이상한 말만 하고 도망갔어. 입체기동 장치가 뭐냐고 물으니까 운동기구라고 하더라."
박준혁이 눈을 찌푸렸다.
"그게 뭐 소리야."
"모르지. 근데 뭔가 진짜 있는 단어 같아. 그냥 지어낸 말 같지는 않았어."
"검색해봤어?"
좋은 생각이었다.
나는 왜 이걸 안 해봤을까. 지난밤 그렇게 뒤척이고도 정작 검색창을 한 번도 안 열었다.
"아니, 아직."
"해봐."
핸드폰을 꺼내서 검색했다.
검색창에 손가락이 이상하게 조급하게 움직였다.
검색 결과는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단어처럼 보였다.
연관 검색어도 없었다. 오타 교정도 뜨지 않았다. 완전한 무(無)였다.
하지만 조합된 단어의 뉘앙스만은 뚜렷했다.
뭔가를 타고 다니는 장치, 그리고 뭔가를 자르는 무기.
마치 다른 시대, 아니면 다른 세계에서 온 단어 같았다.
박준혁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진태야, 이거 진짜 이상한데. 그 여자 정체를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어떻게."
"몰라, 일단 다음에 만나면 뒤를 밟아볼까."
"미행하자고?"
"응."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안 들키면 되지."
박준혁이 씩 웃었다.
그 순간 준혁의 얼굴엔 진짜 걱정과 진짜 흥미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그 웃음을 보며 생각했다.
적어도 이 사람만큼은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 확신 하나가 지금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밧줄 같았다.
수업 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선생님 목소리가 자꾸 귓가에서 흩어졌다.
필기를 하다가도 손이 멈췄다. 노트 귀퉁이에 나도 모르게 '입체기동'이라는 글자를 적었다가 지웠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날 무렵 창밖을 보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운동장 구석에, 서다인이 서 있었다.
교문 쪽이 아니라 아무도 안 다니는 구석에.
축구골대도 없고 벤치도 없는, 그야말로 쓸모없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허공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이 나타났다.
순간이었다.
눈을 깜빡이니 사라졌다.
환각인가.
눈을 비볐다. 다시 봤다. 그녀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손에 들려 있던, 아니 들려 있던 것처럼 보였던 그 반짝임은 흔적도 없었다.
다시 봤지만 그녀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있던 자리에는 그저 마른 흙바닥과 바람에 흔들리는 잡초 몇 개뿐이었다.
뭘 본 거지.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방금 본 게 진짜였는지, 눈의 착각이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이제 더 이상 의심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무게로 가슴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