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학교에 갔다.
서울고등학교 정문을 넘어서자마자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건물은 낯설지 않았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계단 몇 개, 복도의 방향, 교실 위치.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머리로는 처음 보는 건물이었다. 그런데 다리는 벌써 신발장을 지나 왼쪽으로 꺾고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두 칸씩 건너뛰는 버릇까지 몸에 남아 있었다.
이상했다.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 몸뚱이는 십칠 년 넘게 여기를 다닌 것처럼 움직였다.
몸은 기억하고 머리는 모른다.
그것참 편리한 신체다.
2학년 3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몇몇이 나를 쳐다봤다.
시선이 스무 개쯤 한꺼번에 꽂혔다. 등짝에 화살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눈빛들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몰라서 그냥 얼어붙었다.
"진태야, 괜찮아?"
누군가 다가왔다.
덩치가 크고, 운동복 바지를 입은 남자애였다. 어깨가 떡 벌어졌고 팔뚝에는 얼핏 봐도 알 수 있는 축구공 자국 같은 굳은살이 있었다.
"박준혁이야, 나 몰라?"
또 이름이었다.
또 낯선 이름이었다.
이쯤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심장이 철렁했다.
"기억을... 잃었어."
"뭐?"
박준혁의 얼굴이 굳었다.
"진짜로?"
"교통사고 났었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박준혁이 내 어깨를 잡았다. 세게.
손가락이 뼈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이 힘 조절 못하는 것도 어쩐지 진짜 친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나 못 알아봐? 우리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잖아. 축구부에서 만났잖아."
초등학교. 축구부.
머릿속에서 뭔가 열리는 듯하다가, 아무것도 없이 그냥 닫혔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박준혁의 눈에서 진짜 걱정이 보였다.
서다인과는 다른 종류의 눈빛이었다.
서다인의 눈은 뭔가를 숨기는 사람의 눈이었다. 이 눈은 아니었다. 그냥 걱정하는, 투명한 눈이었다.
이 사람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확신이 들었다.
"미안, 진짜로 기억이 안 나."
"괜찮아, 괜찮아. 병원에서는 뭐래?"
"시간 지나면 돌아올 수도 있다고."
박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주변 애들도 몇 마디씩 거들었다.
"야, 진태 원래 축구 잘했잖아. 3반 에이스였는데."
"수학은 완전 바닥이었어. 지난 시험에 몇 점 받았는지 알아? 22점."
"라면 진짜 좋아했어. 매점 라면 하루에 두 개씩 먹었잖아."
작은 조각들이었지만 모두 진짜처럼 들렸다.
라면 두 개. 그건 왠지 믿음이 갔다. 지금도 배가 고팠으니까.
그중에 서다인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나는 칠판을 보는 척하며 머릿속으로 어제 일을 되짚었다. 병원 앞에서의 만남, 서다인의 손, 그 애가 알고 있던 내 주소, 그리고 오늘 아침 발밑에서 저절로 움직이던 이 낯선 몸.
뭔가가 어긋나 있었다.
정확히 뭐가 어긋난 건지는 몰랐지만, 톱니바퀴 하나가 빠진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쉬는 시간, 박준혁과 복도에 나왔다.
"근데 진태야, 너 여자친구 있었어?"
갑자기 물어봤다.
"없었어. 최근에 관심 있는 애도 없었고."
"어제 어떤 여자애가 나타났는데, 자기가 내 여자친구래."
박준혁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가고, 입꼬리가 조금 처졌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과 걱정스러운 표정이 반씩 섞인, 애매한 얼굴이었다.
"뭐? 누구?"
"서다인이라고, 우리 학교 전학생이래."
박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이름 처음 들어."
심장이 덜컥했다.
"우리 학년에 전학생 있었나?"
박준혁이 다른 애들을 불렀다.
"야, 우리 학년에 전학생 있었냐? 서다인이라고?"
애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처음 듣는데."
"몰라, 전학생 온다는 얘기 없었잖아."
"서다인? 그런 이름 들어본 적도 없어. 우리 학교에 그런 애 없어."
다들 모른다고 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물어본 애들이 전부 똑같은 대답을 했다. 마치 미리 짠 것처럼 깨끗하게.
서다인은 어제 서울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분명히 이 학교 학생이라고 했다.
교복 색깔, 명찰 위치, 넥타이 매는 방식까지 지금 눈앞의 애들과 똑같았다.
그런데 아무도 모른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진태야, 그거 좀 이상한데."
박준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학년 담임한테 물어볼까?"
"어."
담임을 찾아갔다.
담임은 삼십대 여자 선생님이었다. 교무실 창가 쪽 책상에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커피가 반쯤 남아 있었다. 김이 다 빠진 걸 보니 아침부터 방치된 커피였다.
"선생님, 저희 반에 서다인이라는 전학생 있나요?"
담임이 명단을 뒤졌다.
손가락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 몇 번, 그리고 침묵.
"없는데. 우리 학교에 그런 이름 자체가 없어. 진태야,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아무것도."
거짓말했다.
말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존재하지 않는 학생이 내 여자친구라고 주장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미친놈처럼 안 보일까. 방법이 없었다. 그냥 삼켰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했는데, 더 이상한 건 그녀의 존재감이었다.
분명히 만졌고, 손을 잡았고, 체온을 느꼈다.
허깨비가 아니었다.
실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학교 학생부에도, 아무의 기억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무실을 나오면서 나는 계속 손을 내려다봤다. 어제 서다인의 손을 잡았던 손이었다.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착각인지 진짜인지 구분이 안 됐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박준혁이 같이 걸었다.
가방을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어슬렁어슬렁 걷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몸이 아직 이 걸음걸이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진태야, 그 여자 다시 만나면 조심해. 뭔가 이상해."
"어, 그럴게."
"연락처는 있어?"
"없어. 그냥 병원 앞에서 만나서 집까지 데려다줬어."
"주소는 어떻게 알았대?"
"모르겠어. 그것도 이상해."
박준혁이 걸음을 멈췄다.
"진태야, 혹시 그 여자가 네 사고랑 관련 있는 거 아니야?"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이었다.
머리가 잠깐 멍해졌다. 사고, 기억상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존재하지 않는 여자애. 이걸 다 하나로 엮으면 그림이 너무 불길했다.
하지만 아니라고 확신할 근거도 없었다.
"모르겠어. 근데 뭔가 이상한 건 확실해."
"야, 그럼 진짜 조심해야겠네. 혹시 걔가 또 나타나면 나한테 바로 전화해. 알겠지?"
"어."
박준혁이 진지한 얼굴로 다짐을 받으려는 듯 나를 쳐다봤다. 그 얼굴이 좀 웃겼다. 기억도 안 나는 친구 하나 지켜주겠다고 저렇게 눈에 힘을 주는 게.
이상한 상황인데도 웃음이 살짝 나왔다.
집 앞에 도착하자 박준혁이 손을 흔들며 갔다.
"내일 또 보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고마워."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그의 번호를 저장하면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적어도 한 명은 진짜였다.
박준혁, 3반, 축구부, 22점짜리 수학 성적, 라면 두 개.
이 정도면 최소한의 현실감은 확보한 셈이었다.
집에 들어와서 현관문을 잠그는데, 문 앞에 뭔가 놓여 있었다.
작은 쪽지였다.
접힌 모서리가 깔끔했다. 손으로 정성스럽게 접은 흔적이었다.
[오늘 학교에서 뭘 물어봤는지 알아. 걔들 말은 신경 쓰지 마. 곧 다시 갈게.]
서명은 없었지만, 필체가 어제 서다인의 것과 닮아 있었다.
기울어진 자음, 유난히 동그란 이응. 어제 그 애가 병원 앞에서 내 손등에 대충 적어준 자기 이름과 똑같은 필체였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학교에서 담임에게 물어본 걸, 어떻게 벌써 알고 있는 거지.
교무실 안에는 나와 박준혁, 담임뿐이었다. 창문도 다 닫혀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을, 대체 어떻게.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단순한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뭔가 훨씬 더 크고 이상한 것이 벌어지고 있었다.
쪽지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걸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곧 다시 갈게.
그 한 문장이 마치 예고장처럼 느껴졌다.
문을 잠그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금장치를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