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밤 나는 한숨도 못 잤다.
천장에 있는 얼룩진 무늬를 세다가, 그마저 지겨워지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가.
'이거 꿈이면 진짜 편할 텐데.'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꿈이라면 눈 뜨면 끝날 텐데, 이건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너무 생생했다. 이불의 감촉, 방 안의 냄새, 창밖에서 들리는 벌레 소리까지. 이런 걸 다 지어낼 수 있나? 내 상상력이 그렇게 좋았나?
그럴 리가.
일단 확인해야 했다. 이게 진짜 게임 속 세계인지, 아니면 내가 뭔가에 크게 홀린 건지.
확인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등교하자마자 교무실로 직행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서류를 뒤적이던 선생님 앞에 서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물었다.
"저기 선생님, 이 학교 언제 개교했어요?"
"어? 갑자기 그건 왜."
선생님이 안경을 슬쩍 올리며 나를 쳐다봤다. 의심스럽다는 눈빛이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숙제 때문에."
숙제라는 말은 즉석에서 지어낸 거였는데, 다행히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선생님이 대충 알려준 연도는 내가 기억하는 게임 설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와, 진짜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 정도 일치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했다. 게임 속 설정집에서 봤던 그 숫자 그대로였다.
확신이 서니 이번엔 탈출을 시도해야 했다.
게임 지식에 이런 게 있었나 곱씹어봤지만, 애초에 이건 '전생해서 게임 세계로 들어왔다'는 상황 자체가 게임 설정에 없는 이야기였다.
공략집에도, 히든 시나리오에도, 심지어 개발자 인터뷰에도 이런 얘기는 없었다.
결국 순전히 내 상상력으로 방법을 짜내야 했다. 참 나, 이럴 때 상상력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첫 번째 시도, 잠을 자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날 밤 일찍 잠들었다.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이불을 뒤집어썼다. 눈을 감으면서도 속으로 빌었다. '제발, 제발 눈 뜨면 우리 집 천장이길.'
다음 날 아침, 나는 똑같은 방, 똑같은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창문 위치도 그대로, 벽지 무늬도 그대로.
'…그럴 줄 알았다.'
기대도 안 했으면서 왜 이렇게 허탈한지.
두 번째 시도, 옥상에 올라가서 뭔가 확인해보려고 했다.
딱히 뛰어내릴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옥상 문이 열려 있으면 뭔가 초자연적인 기운이라도 느껴질까 싶었던 거다. 영화에서 보면 이런 장소에 꼭 뭔가 있잖은가. 균열이든 문이든.
쉬는 시간을 틈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경비 아저씨한테 딱 걸렸다.
"학생, 여기 왜 올라와."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심장이 철렁했다.
"아, 그냥 바람 좀 쐬려고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위험하니까 내려가."
아저씨는 팔짱을 낀 채 물러나지 않았다.
'…이건 뭐 초자연적인 게 아니라 그냥 규정 위반이네.'
허무하게 쫓겨났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혼자 실소가 터졌다. 뭘 기대한 거냐 나는.
세 번째 시도는 조금 무모했다. 손끝을 살짝 베어서 상처를 내봤다.
칼끝이 피부에 닿는 순간 순간적으로 망설였지만, 이내 힘을 줬다.
통증이 진짜였다. 따끔한 느낌이 손끝에서 팔뚝까지 퍼졌다.
'현실감이 이렇게 확실한데 이게 게임이라고?'
근데 그 통증마저도 게임적 설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더 소름이 돋았다. 만약 이 세계가 통증까지 완벽하게 구현한 시뮬레이션이라면, 나는 뭘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손끝에 밴드를 붙이면서 혼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와,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자해까지 해가면서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 웃기면서도 서글펐다.
결국 며칠간의 시도 끝에 결론은 하나였다.
여기서 나갈 방법은 없다.
적어도 지금 내가 아는 방법으로는.
잠도 소용없고, 옥상도 소용없고, 상처도 소용없다면 남은 게 뭐가 있나.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밤에 침대에 누워 있으니 파편적인 장면들이 계속 스쳐 지나갔다.
낯선 교실, 낯선 계단, 낯선 옥상. 그런데 다 어딘가 익숙했다.
마치 여러 번 반복해서 본 것 같은 느낌.
분명 처음 걸어본 복도인데 발걸음이 자연스러웠다. 처음 본 얼굴들인데 이름이 저절로 떠올랐다.
'이거 설마, 나 여기 처음 온 게 아닌 건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처음이 아니라, 몇 번이고 되돌아가서 다시 겪고 있는 거라면.
그리고 그때마다 결국 같은 결말을 맞았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자리에서 넘어지고, 같은 결말로 굴러떨어지는 거라면.
'그럼 진짜 답 없는 거 아니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불을 끌어당겼지만 한기가 가시질 않았다.
방 안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창밖 벌레 소리마저 뚝 끊긴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억지로 생각을 정리했다.
패닉에 빠져서 좋을 게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냉정함이었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였다.
이 안에서 살아남는 것.
하은이 배드엔드로 가지 않으면, 나도 그 배드엔드에 끌려가지 않는다.
결국 내 생존은 하은의 생존과 묶여 있었다.
이건 감정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생존 전략이었다. 하은을 살리는 게 곧 나를 살리는 거였으니까.
'좋아, 그럼 목표는 정해졌다. 하은을 죽지 않게 만든다. 그게 곧 내가 사는 길이다.'
생각이 정리되니 오히려 마음이 좀 편해졌다. 최소한 방향은 잡혔으니까.
막막함 속에서도 뭔가 붙잡을 게 생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다음 날 학교에 갔을 때,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하은을 지켜보기로 했다.
가방을 메고 교실로 들어서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오늘부터는 다르게 산다. 방관자가 아니라 관찰자로, 그리고 필요하면 개입자로.
그런데 교실에 하은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빈 책상을 보는 순간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유하은 오늘 결석이야?"
짝꿍한테 물으니 대충 고개를 저었다.
"몰라, 연락 없었대."
심드렁한 대답이었다. 나만 이상하게 예민한 건가 싶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담임도 딱히 아는 게 없는 눈치였다. 출석부를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 학생 원래 결석 없었는데."
그 한마디가 자꾸 귀에 걸렸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하은의 SNS를 확인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마지막 게시물이 그날 밤 올라온 것이었다.
한 줄짜리 짧은 글.
『다 필요 없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거, 이거 지금 무슨 신호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게임 속에서 봤던 배드엔드 트리거 대사와 비슷한 뉘앙스였다. 아니, 비슷한 게 아니라 거의 동일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담임이 뭐라고 하는지도 안 들렸다.
일단 하은의 집으로 가야 했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