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시 쓰는 벚꽃엔딩

2화

다음 날부터 상황이 조금씩 이상하게 굴러갔다. 교실 뒷문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기가 달랐다. 평소라면 그냥 시끄러운 잡음이었을 텐데, 그날은 유독 하은 이름이 자주 섞여 나왔다. "재혼 가정이라서 그런가, 눈치가 없더라." "걔 원래 아빠도 없었다던데?" "엄마가 재혼한 거 맞대. 그래서 성도 두 번 바뀌었다잖아." 뒷자리 여자애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못 들은 척하는 게 예의였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소리들이 다 귀에 박혔다. '저것들은 뭐 남 얘기하는 게 취미인가.' 내 책상은 그 무리에서 두 칸 떨어져 있었는데도, 목소리 볼륨이 점점 커져서 안 들리는 게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마치 하은이 듣든 안 듣든 상관없다는 듯, 대놓고 소문을 퍼뜨리는 느낌이었다. 주도하는 애는 서지은이었다. 서지은은 반에서 목소리가 제일 크고, 무리를 몰고 다니는 타입이었다. 예쁘고 성적도 좋았지만, 남 흠집 내는 데는 재능이 넘쳤다. 선생님들 앞에서는 얌전한 척, 반장 후보로도 나올 만큼 이미지 관리도 철저했다. 근데 그 이면은 딴판이었다.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하은이 인사를 건네도 서지은은 대놓고 무시했다. "안녕." "어, 미안. 안 보였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저런 소리를 했다. 하은이 바로 코앞에서 손을 흔들었는데 안 보였다는 게 말이 되나. 나는 그 장면을 두 번이나 목격했다. 매번 같은 톤, 같은 표정. 완전히 각본을 짜놓은 것 같았다. 하은은 그냥 웃고 넘겼다. 매번 그랬다. '저러니까 더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속으로 답답했지만 내가 나서서 뭐라 할 처지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반의 배경 인물이었다. 존재감 없는 애들 중 하나. 괜히 나섰다가 다음 표적이 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했다. 체육대회 준비로 반 분위기가 어수선한 어느 날, 담임이 조를 짜라고 했다. 네 명씩 조를 짜서 릴레이 순서를 정해야 하는데, 다들 눈치껏 마음 맞는 애들끼리 붙었다. 교실이 순식간에 시장판처럼 변했다. 여기저기서 "야 우리 조하자", "너 빠른 애랑 붙어야지" 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하은만 마지막까지 남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눈치를 보는데, 아무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이 좀 불편해졌다. '저기 저러고 있는데 진짜 아무도 안 데려가네.' "어… 하은이는 저기 3조 가면 되겠다." 담임이 어색하게 배정해줬고, 3조 애들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와, 진짜 대단들 하시네.' 나는 마침 3조였다. 하준도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한 명은 반에서 거의 존재감 없는 남자애였는데, 이쪽 상황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날부터 나는 어쩌다 보니 하은, 하준과 자주 붙어 있었다. 연습 시간에 셋이 트랙 옆에서 순서를 맞추다가, 하은이 하준을 힐끔거리는 걸 봤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바통을 주고받는 연습을 할 때도, 하준이 웃으면서 뭔가 설명할 때도, 하은의 시선이 자꾸 그쪽으로 향했다가 얼른 다른 데로 옮겨갔다. '어, 이거 뭐지.' 하은이 하준을 좋아하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근데 하준은 전혀 몰랐다. 얘는 진짜 순진한 건지 둔한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연습 끝나고 하은이 물통을 건네도 하준은 그냥 고맙다고만 하고 끝이었다. "고마워." 딱 그 한마디. 그 뒤로 아무런 여지도 없이 바로 다른 얘기를 시작했다. 오늘 릴레이 순서 어떻게 할지, 마지막 바퀴는 누가 뛸지. '저 자식은 진짜 눈치가 없나.' 나는 옆에서 그걸 지켜보면서 답답함과 재미가 반쯤 섞인 기분이었다. 남의 연애사에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나도 몰랐다. 체육대회 전날, 하은이 나한테 조용히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다른 애들이 다 빠져나간 교실, 창문으로 저녁 햇빛이 길게 들어오고 있었다. "저기, 도윤아." "응?" "내일 끝나고… 이하준한테 뭐 좀 물어봐 줄 수 있어?" "뭘?" 하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손가락으로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면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번 주말에… 도서관 같이 갈 수 있는지." '어라. 이거 데이트 신청 아니냐.'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참았다. 이 나이에 도서관 같이 가자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사람이 어디 있나. "직접 물어보면 되지." "…그게 좀 무서워서." 하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시선은 바닥에 고정된 채였다. 그 표정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 마치 몇 번이나 이런 순간을 겪어본 사람처럼. 거절당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이미 거절당해본 경험이 몸에 새겨진 사람 같은 느낌. '뭐야, 왜 이렇게 짠하지.' 나는 결국 대답을 못 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한번 얘기는 해볼게. 근데 진짜 직접 말하는 게 나을 텐데." "알아. 그냥… 자신이 없어서."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하은의 사정을 조금 더 알게 됐다. 재혼 가정, 아버지 부재, 그리고 그걸 눈치 없이 떠들어대는 반 애들. 이 정도 얘기를 들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게 얼마나 큰 결심이었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다음 날, 체육대회는 무사히 끝났다. 하은과 하준, 나는 3조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다. 하은은 마지막 바퀴에서 넘어질 뻔했는데도 끝까지 뛰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좀 응원했다. '잘 뛰네, 저 정도면 괜찮지.' 종례 후 애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교실에서, 하은이 직접 하준에게 다가갔다. 결국 못 참고 스스로 물어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내가 말을 전할 새도 없이 하은이 먼저 움직였다.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짐을 챙기며 그 상황을 지켜봤다. 가방 지퍼를 괜히 여닫으면서 시간을 끌었다. '잘돼야 할 텐데.' "저기, 하준아." "응, 왜?" "이번 주말에… 도서관 같이 갈래?"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직 남아 있던 애들 몇이 슬쩍 이쪽을 쳐다봤다. 서지은도 그중 하나였다. 눈빛이 반짝였다. 딱 재밋거리 생겼다는 표정. '제발, 제발 좀 잘 넘어가라.' 나는 숨을 죽였다. 손에 쥐고 있던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 하준은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어? 아, 나 이번 주말에 서지은이랑 스터디 하기로 했는데."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지은이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 표정에서 나는 뭔가 묘한 걸 읽었다. 놀란 게 아니라,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한 얼굴. 하준은 그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태연했다. "다음에 시간 맞으면 가자." 하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입술이 살짝 떨렸고, 손끝이 가방끈을 붙잡은 채로 굳어 있었다. 순간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소름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이거, 뭔가 잘못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확신처럼 그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거절당해서 속상한 것과는 다른 종류의 불길함이었다. 마치 뭔가가 돌아가는 것을 잘못 눌러버린 느낌. 하은은 아무 말 없이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갔다. 뒷모습이 이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평소와 달랐다. 발을 옮기는 게 아니라 끌려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 순간, 처음 보는 장면인데도 이미 결말을 아는 사람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가방을 챙기다 말고 하은의 뒤를 따라 교실 문을 나섰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뭔지는 나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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