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꿉친구는 사양하겠습니다

4화

매점 소동 이후로 나에 대한 소문은 반을 넘어 학년 전체로 퍼져나갔고, 며칠간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낯모르는 아이들의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시선이라 여기고 넘겼는데, 하루 이틀 지나면서 그 시선이 점점 노골적으로 바뀌어가는 걸 느꼈다. 급식실에서 밥을 먹다가도 옆 테이블 아이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계단을 오르다가도 위층에서 누군가 "저 애 맞지?" 하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옮겼지만, 속으로는 매번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고, 이렇게까지 눈에 띄게 되는 건 결코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원래 나는 그림자처럼 지내는 게 좋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도,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딱히 바라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하루를 흘려보내는 게 내가 아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으니까. 그런데 매점에서의 그 일 하나로 그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 같아서, 교실 문을 열 때마다 나도 모르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그날 방과 후, 텅 빈 교실에 남아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함성이 아득하게 들려왔고, 청소 당번들이 대걸레를 끄는 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나는 책상 서랍에 있던 프린트 몇 장을 가방에 쑤셔 넣으며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겼다는 생각에 잠깐 안심하던 참이었는데, 그 순간 서준이 책상에 걸터앉으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진짜 왜 그렇게까지 눈에 안 띄려고 애쓰는 거야?" 그 질문에 나는 순간 손이 멈칫했다. 가방끈을 정리하던 손가락이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서준의 시선이 내 얼굴 위에 가만히 얹혀 있는 게 느껴졌다. "그냥... 조용한 게 좋아서."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다는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서준은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고, 다리를 흔들며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어딘가 다 안다는 듯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운동장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고, 그 붉은 빛이 창틀에 걸려 교실 안을 어슴푸레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의 기억이 아주 잠깐,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때도 이렇게 누군가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적이 있었고, 그때의 공기와 소음과 냄새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가, 이내 흐릿하게 흩어졌다. '그때... 그 일만 없었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그걸 애써 삼키며 짧게 답했다. "예전에 좀... 일이 있었어. 그게 다야." 서준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한 번 툭 치며 "그래, 뭐.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하고 넘어가 주었는데,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누군가 이렇게까지 나를 밀어붙이지 않고 기다려준다는 게, 오히려 더 낯설고 어색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서준은 손끝으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리며 딴청을 부렸고, 나는 그 손끝의 움직임을 괜히 눈으로 좇다가 다시 가방을 정리하는 척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조용한 대화가 이어지던 중, 교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뚝. 나타난 사람은 반에서 나름 인기가 많은 남학생, 이현재였다. 큰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체격, 언제나 여유로운 미소를 걸고 다니는 그는 최근 유나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던 아이 중 한 명이었다. 교복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로, 가방을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걸이에는 원래부터 자신이 이 공간의 주인공이라는 듯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어, 강도윤. 마침 잘 있었네." 그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압박이 섞여 있었고, 나는 별로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아 가방끈을 고쳐 쥐었다. 서준은 책상에서 슬쩍 내려와 팔짱을 끼고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라도 만난 것처럼 뒤로 반걸음 물러섰다. "천유나랑 진짜 사귀는 거야, 아니면 그냥 소꿉친구야?" 직설적인 질문이 날아들었고, 나는 잠깐 말을 고르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냥 어릴 때 친구였어. 그게 다야." "그럼 나 걔한테 관심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거지?" 이현재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고,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상관없어." 그 대답에 이현재는 잠깐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가방을 고쳐 메며 창가 쪽으로 몸을 반쯤 돌렸는데, 그 여유로운 태도 속에서도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의외로 담백하네. 뭐, 좋아. 그럼 서로 신경 쓸 거 없겠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교실을 나섰지만, 문을 나서기 직전 뒤돌아보며 낮게 덧붙였다. "근데 그렇게 말하는 놈치고, 표정은 별로 안 상관없어 보이는데."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는 순간 말을 잃고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교실 안에는 방금 전까지 있던 사람이 하나 사라진 것치고는 이상하게도 무거운 공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창밖의 함성 소리마저 잠깐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서준이 옆에서 팔짱을 끼며 실소를 흘렸다. "방금 그 표정, 나도 봤어." "...무슨 표정." "몰라서 물어?" 서준의 짓궂은 웃음에도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가슴 한쪽이 이렇게 답답한 건지, 나조차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가방을 다시 고쳐 메면서도 손끝이 미묘하게 떨리는 걸 감추려 애썼고, 서준은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더 이상 묻지 않고 먼저 교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가자, 늦었어." 그 짧은 말 한마디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 걸음을 옮겼는데, 복도를 걸어 나가는 그 짧은 사이에도 자꾸만 이현재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되풀이되어 맴돌았다. 표정은 별로 안 상관없어 보이는데. 그 말이 대체 무슨 표정을 두고 한 소리인지, 나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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