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꿉친구는 사양하겠습니다

2화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옆에서 훅 하고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교실 안은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고, 누군가는 매점으로 달려가고 누군가는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는 그 흔한 쉬는 시간의 풍경 속에서, 유독 그녀의 발소리만이 또렷하게 내 귀에 박혀왔다. "진짜 기억 안 나? 나야, 유나." 그녀는 의자를 바짝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두 눈을 반짝였고, 나는 애써 시선을 책상 위로 떨어뜨리며 대답을 피했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은발 위에서 부서지듯 반짝이는 걸 곁눈질로 확인하면서도, 나는 그 시선을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사람 잘못 본 것 같은데."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 것 같아서, 나는 스스로도 그게 못마땅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저려오는 걸 감추려 애꿎은 필통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움직임조차 그녀에겐 다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녀는 그 말에 잠깐 어깨를 늘어뜨리는가 싶더니, 곧 다시 눈을 빛내며 가방에서 작은 열쇠고리를 꺼내 내 앞에 들어 보였다. 낡고 색이 바랜, 작은 곰인형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한쪽 눈 부분의 실이 풀려 흐릿해진 것도, 귀 한쪽이 유독 닳아 있는 것도, 전부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거, 초등학교 3학년 때 네가 준 거잖아. 기억나지?"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혼자 서 있던 전학생. 그 애의 옆에 나란히 서서 우산을 씌워준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입학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오후, 갑작스레 쏟아진 비 때문에 학교 앞 정류장에는 우산을 챙긴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우산을 편 아이들끼리 셋씩 넷씩 몰려 낄낄대며 뛰어가는 소리, 빗물이 아스팔트를 때리는 소리, 그 사이로 들리던 낮은 천둥소리까지도 지금 이 순간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혔던 건, 교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비를 그대로 맞고 있던 조그마한 여자애였다. 어깨까지 오는 짙은 갈색 머리가 비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고, 낡은 책가방을 두 손으로 꼭 끌어안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 뒷모습이, 어린 나의 눈에도 유난히 작고 외로워 보였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짙은 갈색 머리에 수줍음 많던 그 애의 이름이 천유나였고, 나는 그때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우산을 나눠 쓰자며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같이 쓸래?" 그 한마디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그 눈빛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4년 동안 거의 매일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반이 아니어도 굳이 쉬는 시간마다 서로의 교실을 찾아갔고, 하교길엔 늘 손을 잡고 걸으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나는 그 시절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시끄럽고 밝고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는 아이였다. 반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외우고 다녔고, 체육대회에서는 늘 앞장서서 소리를 질렀으며, 유나가 낯을 가리며 뒤로 숨을 때마다 그 손을 끌어 앞으로 데려오던 것도 나였다. 그러다 6학년이 끝나갈 무렵, 유나의 부모님이 일 때문에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그녀는 갑작스레 전학을 가버렸다.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겨울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던 날 텅 빈 그녀의 자리를 보고서야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한동안 학교 가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던 걸 기억한다. 우리는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의 소식조차 모른 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왔다. 전화번호도, sns 계정도 남기지 못한 채 헤어진 그 인연이 이런 식으로 다시 이어질 거라고는, 나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애가, 이렇게...' 나는 눈앞의 은발 소녀와 기억 속의 수줍던 여자애가 도무지 겹쳐지지 않아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색이 옅어 거의 회색에 가까운 은발과, 짙은 파란빛이 도는 눈동자, 예전보다 훌쩍 자란 키와 또렷해진 이목구비까지. 어디를 봐도 3년 전 그 조그맣던 아이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염색도 하고, 렌즈도 꼈어. 좀 놀랐지?" 그녀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장난스레 웃으며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겼고, 나는 그 웃음이 예전 그대로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입꼬리가 한쪽만 살짝 올라가는 그 특유의 웃음버릇, 눈을 마주칠 때 잠깐 눈썹을 찡그리는 습관까지도, 겉모습이 전부 바뀌었어도 그 안의 무언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겉으로는 무덤덤한 얼굴을 유지하려 했지만, 속으로는 이 재회가 반갑기도 하고, 동시에 불안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고 있었다. 반가움이 먼저 치솟았다가, 그 뒤를 바로 불안이 덮쳐오는 그 낙차가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지금의 조용한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인연조차 조심스레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는 다르니까. 누구와도 깊게 얽히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지내는 것. 그게 지금의 내가 스스로에게 세운 유일한 규칙이었다. 그런데 그 규칙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 이제 예전 같지 않아. 그냥 모른 척 지내자."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뱉었지만, 그녀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눈빛을 더 또렷하게 굳혔다. 손에 쥐고 있던 곰인형 열쇠고리를 조용히 필통 위에 내려놓으며, 그녀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싫어. 나 3년 동안 너 다시 만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심상치 않았다. 3년이라는 시간, 얼마나 노력했다는 그 짧은 말 안에 얼마나 많은 밤과 얼마나 많은 마음이 쌓여 있었을지, 나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머리도 눈도, 성격도 다 바꿨어. 네가 나 다시 봐줄 때까지, 나 절대 안 숨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고, 나는 그 결기 어린 눈빛 앞에서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예전의 그녀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투였다. 낯을 가리고, 늘 내 뒤에 숨던 그 아이가 이제는 나를 정면으로 마주 보며 물러서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뚝. 교실 안의 소음이 갑자기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의자 끄는 소리,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전부 아득하게 지워지고, 오직 그녀의 두 눈만이 나를 향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 재회가 결코 조용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그날 처음으로 내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아마도 틀리지 않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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