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가출소녀, 재워주기로 했다

5화

휴대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부르르, 부르르. 이슬의 손안에서 화면이 계속 밝아졌다 꺼지길 반복했다. 그녀는 통화 버튼도, 거절 버튼도 누르지 못한 채 그저 얼어붙은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는데, 마치 얇은 유리를 쥐고 있는 사람처럼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안 받아도 돼."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손을 감싸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차마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아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진동이 멈추고 화면이 어두워지자, 그녀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숨소리가 마치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깨가 조금씩 내려앉는 게 보였고, 나는 그제야 그녀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일부터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계속 미뤄뒀던 질문이었다. 언제까지 우리 집에 있을 수는 없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며칠째 이 질문이 목구멍 안쪽에서 맴돌고 있었는데, 이제야 겨우 밖으로 꺼낸 셈이었다. "……모르겠어." 그녀가 작게 대답했다. "학교는 가야 하는데, 집에는 못 들어가겠고." 자조적인 웃음이 그녀의 입가에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 표정이 너무 위태로워서,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마치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조금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깨질 것 같은. "당분간은 여기 있어." 나는 결국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자주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진심이야?" "응. 서윤이도 좋아하잖아. 부모님도 별로 신경 안 쓰실 거야." 사실 부모님께는 아직 제대로 말씀드리지도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엔 어떻게든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말을 뱉고 나서야 뒷일을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자주색 눈동자에 물기가 서서히 차오르는 게 보였다. "……왜 이렇게까지 해줘."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을 찾지 못한 채, 그냥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몰라. 그냥 그러고 싶어서." 진심이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안쪽에서 계속 부풀어 오르고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아직 나조차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마치 갈 곳 잃은 새끼 고양이 같아서, 나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 다음 날, 다인이 다시 우리 집을 찾아왔다. 딸랑, 초인종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이번엔 서윤이 초대한 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 "야, 궁금해서 못 참겠어서 왔어." 그녀가 현관에 서서 웃으며 말했다. 손에는 또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는데, 봉투 안에서 과자 봉지들이 부딪는 소리가 났다. "뭘 이렇게 또 사 왔어." 나는 봉투를 받아 들며 물었다. "심심해서. 그리고 이슬이 좋아할까 봐." 다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신발을 벗었다. 거실에 넷이 모여 앉았을 때, 다인은 유독 나와 이슬 사이를 오가며 짓궂은 시선을 던졌다. 눈동자를 이쪽저쪽으로 굴리며 입꼬리를 슬쩍 올리는 게, 무언가 재밌는 걸 발견한 사람의 표정 그대로였다. "둘이 뭔가 케미 있는데?" 그녀가 장난스럽게 던진 말에 이슬이 살짝 당황한 듯 시선을 피했고, 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얼굴이 다시 화끈거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니야, 그런 거." 나는 서둘러 부정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게 나온 것 같아서 스스로도 민망했다. 다인은 그 반응이 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부정하는 게 더 티 나는데." 서윤도 옆에서 킥킥 웃으며 맞장구쳤다. "오빠 요즘 계속 이상해요. 이슬 언니만 보면 이상하게 굴어." "이상하다니, 뭐가." 나는 항변하듯 되물었지만, 서윤은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말 걸 때 목소리 달라지고요, 자꾸 눈치 보고요, 그리고—" "그만." 나는 서윤의 입을 손으로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둘 다 그만해." 나는 손사래를 치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슬이 조용히 나를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정확히 읽어낼 수 없었다. 부끄러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 저녁 시간이 되어 다인이 돌아가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는데, 그녀가 나를 잠깐 불러 세웠다. "민준아, 잠깐." 서윤과 이슬이 거실에 있는 사이, 나는 다인을 따라 현관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계단 조명이 어둑하게 켜져 있는 복도에서, 다인은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너 진짜 몰라?" 다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뭘." "네 표정. 완전 좋아하는 사람 보는 표정이야." 그 말에 심장이 갑자기 세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갓 잡은 활어처럼 심장이 펄떡였다. 나는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됐어, 됐어." 다인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너 얼굴 빨개진 거 보이거든." 나는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볼을 슬쩍 문질렀지만, 이미 열이 오른 얼굴은 감춰지지 않았다. "모르는 척하지 마. 얼마 안 남았어." 다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거실로 돌아오자 이슬이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얼굴이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노란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서윤은 이미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거실엔 우리 둘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 옆에 앉았다. 소파가 살짝 눌리는 느낌과 함께 그녀에게서 옅은 샴푸 향이 풍겨왔다. "괜찮아?" 물었더니,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민준아." 그녀가 낮게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성을 떼고 부르는 이름이었다.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응." 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갈라지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자주색 눈동자 안에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는 게 보였다. 두려움, 기대, 그리고 뭔가 더 깊은 것.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으니 숨이 조금씩 얕아지는 것 같았다. "나……" 그녀가 입을 열려는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부르르. 그 소리에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다시 하얗게 굳어버렸다. 이번엔 저장된 이름이었다. '아빠'. 그녀는 휴대폰을 든 채 손을 떨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하고,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무슨 표정을 지으려 했는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얼어붙은 얼굴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부르르. 다시 한번, 휴대폰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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