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한 거짓말

4화

결혼 이 년째, 초여름의 어느 저녁이었다. 하윤은 야근을 마치고 나온 회사 앞에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는데, 발신자는 태호였고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무거운 그늘이 짙게 배어 있어서, 그녀는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이미 심장 한쪽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깐만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그가 낮게 묻자, 하윤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고, 목소리에 실린 절박함이 그녀의 오래된 습관을 다시 깨워냈는데, 그 습관이란 다름 아닌 그의 부름에 반응하는 몸의 기억이었다. "지금요?" 그녀가 되묻자, 태호는 잠시 침묵했다가 "응, 지금."이라고만 짧게 답했고, 그 단답 속에 담긴 무게가 오히려 그녀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전화를 끊은 뒤, 하윤은 회사 앞 정류장에 잠시 서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초여름의 저녁 공기는 아직 후텁지근했지만 어딘가 서늘한 예감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 한강 근처, 사람이 드문 벤치.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는데, 강바람이 태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동안, 그는 손에 든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며 한동안 말을 아꼈고, 하윤은 그의 옆얼굴에서 평소와 다른 피로의 결을 읽어내고 있었다. 강물 위로 가로등 불빛이 흔들리며 부서지고 있었고, 그 부서지는 빛이 마치 태호의 마음속 어딘가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하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큰애가 재수를 하겠대."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을 때, 하윤은 그의 옆얼굴에 새겨진 지친 그림자를 조용히 바라보았는데, 그 말 한마디에 담긴 무게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성적이 원하는 만큼 안 나왔나 봐. 집사람은 애 붙잡고 매일 울고,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가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덧붙이자, 하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살짝 감쌌는데, 그 접촉이 익숙한 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져서 순간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속상하시겠어요." 그녀가 나직이 말하자, 태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는 종이컵 속의 커피를 한 모금 삼켰는데, 그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고, 그 냉기가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마치 그의 마음 전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째는 요즘 방에서 나오지도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고." 태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하윤은 그 순간 그가 가정이라는 무게에 짓눌린 한 명의 지친 가장으로만 보였고, 그 모습에서 처음으로 순수한 안타까움이 솟구쳐 올랐다. "밥은 먹고 다녀요?" 그녀가 뜬금없이 물었을 때, 태호는 픽 웃음을 흘리며 "그런 걸 왜 묻냐."라고 되물었지만, 그 웃음 끝에는 씁쓸함이 짙게 배어 있었고, 하윤은 그 씁쓸함을 눈치채지 못한 척 애써 시선을 강물 쪽으로 돌렸다. "애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져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네자, 태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 속에는 감사함과 함께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뒤섞여 있어서, 하윤은 그 눈빛을 마주하는 것이 문득 버거워졌다. "너한테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참 못났다, 그렇지." 그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중얼거리자, 하윤은 순간 목이 메었는데, 이 관계가 더 이상 단순한 욕망이나 긴장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 전체와 얽혀버린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실감했다. 강바람이 다시 한 번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고, 하윤은 그 바람 속에서 자신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지나쳐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 느낌의 실체를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의 만남은 은밀한 밀회에서 벗어나, 그의 가정사를 나누는 자리로 조금씩 변해갔는데, 태호는 자녀의 성적표를 두고, 아내와의 냉랭해진 대화를 두고,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하듯 하윤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어떤 날은 짧은 문자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오늘 좀 힘드네.] 그 짧은 문장 하나에도 하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답장을 고민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화면만 들여다보다가 결국 [무슨 일 있으세요?]라는 평범한 문장을 보냈고, 그 평범함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드는 것 같았다. "둘째가 오늘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더라." 어느 날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을 때, 하윤은 늦은 밤 남편이 잠든 옆에서 조용히 거실로 나와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는데, 그 순간 그녀의 안에서는 죄책감과 온기가 동시에 차오르고 있었다. 거실의 불을 켜지 않은 채, 그녀는 소파 한쪽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낮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받아주었고, 창밖으로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만이 유일한 조명이 되어 그녀의 얼굴 위로 옅게 흔들리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겠어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하자, 태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그냥... 누구한테라도 말하고 싶었어."라고 답했는데, 그 말 속에 담긴 외로움이 하윤의 가슴을 깊이 찔렀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습관이 되어가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지만, 그 되뇜이 오히려 관계를 정당화하는 또 다른 자기기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하윤은 한동안 어두운 거실에 그대로 앉아 있었는데, 남편이 잠들어 있는 방문 쪽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이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 가을밤, 조용한 카페의 구석 자리. 태호가 오랜만에 그녀를 조용히 불러내어 마주 앉았을 때, 그의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어떤 결심이 담겨 있었고, 하윤은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이미 무언가가 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의 커피가 놓여 있었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고, 창밖으로는 낙엽이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하윤아, 우리 이제 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그가 낮게 운을 떼자, 하윤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애들이 많이 컸어. 눈치도 빨라졌고. 집사람도 요즘 이상하게 예민해." 그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을 때, 하윤은 그 말속에서 관계의 끝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얼마 전에는 큰애가 나한테 묻더라. 아빠 요즘 왜 자꾸 늦게 다니냐고." 그가 시선을 내리깔며 말하자, 하윤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는데, 그 질문이 마치 자신을 향한 것처럼 들려서였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그녀가 겨우 물었을 때, 태호는 잠시 대답을 미루다가 "그냥 회사 일이 바쁘다고 했지."라고 말했지만, 그 말투 속에는 거짓말을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 예감이 그녀의 가슴에 서늘한 균열을 만들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안도감과 비슷한 감정이 그 균열 사이로 스며들었는데, 그녀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애써 외면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미안하다." 태호가 나직이 덧붙였을 때, 하윤은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가족을 향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고, 그저 창밖의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안.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윤은 문득 손을 아랫배에 가져다 대었는데, 며칠 전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가 아직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지하철이 덜컹거리며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손끝도 함께 떨렸고, 그 떨림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무게가 얼마나 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어두운 터널을 바라보며, 하윤은 그날 병원에서 의사가 건넨 짧은 한마디를 다시 떠올렸는데, 그 한마디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모든 세계를 뒤흔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녀는 속으로 되물었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고, 지하철은 그런 그녀의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다음 역을 향해 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