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한 거짓말

2화

같은 날 오후 두 시, 강남의 한 카페. 하윤은 저자와의 미팅을 마치고 나온 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다음 일정까지 남은 삼십 분을 카페 안에서 흘려보내고 있었다. 방금 만난 저자는 원고 마감을 세 번이나 미룬 사람이었고, 그런 그를 다독이며 웃는 얼굴로 커피값을 계산하고 나오는 동안 하윤의 어깨는 이미 뻐근하게 굳어 있었는데, 자리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넘기고 나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빨대 끝에 맺힌 물방울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보던 그녀는, 가방 속에서 진동하던 휴대폰을 꺼내 아침에 온 문자를 다시 열어보았는데, 화면 위에는 짧은 한 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랜만이다. 얼굴 한번 보자.] 그 문장을 읽는 동안 그녀의 손끝은 카페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였고, 다섯 해라는 시간의 무게가 손끝을 타고 올라와 목덜미까지 번지는 느낌이었다. '태호 선배.'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명치 어딘가가 조용히 조여왔다. *** 오 년 전, 늦가을이었다. 회사 동료들 몇이 모여 술을 마시던 자리였고, 오랜만에 다시 얼굴을 마주한 태호는 그날따라 유독 말이 없었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태호.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였고, 입사 시절부터 늘 여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무성했던, 조용하지만 결코 만만하지 않은 인상을 가진 선배였다. 웃을 때조차 눈매는 서늘했고, 그 서늘함이 사람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날 밤, 술집을 나선 그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란히 걸었는데, 겨울바람이 매섭게 뺨을 스치는데도 하윤은 이상하게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 그가 먼저 물었을 때, 하윤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렸는데, 사실은 그의 옆얼굴을 힐끔거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이상하게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그리며 지나갔고, 그 명암의 경계가 흐트러질 때마다 하윤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택시 잡아줄게." 태호가 손을 들어 도로 쪽을 향해 흔들려는 순간, 하윤이 무심코 그의 팔을 붙잡았고, 그 접촉의 감각이 두 사람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손끝에 닿은 코트 자락의 감촉이 차가웠는데, 그 차가움 속에서도 그의 팔뚝 아래 단단하게 느껴지는 온도가 있었고, 하윤은 그 온도를 놓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그 순간 처음으로 또렷하게 인식했다. "선배." 그녀가 그를 불렀지만, 그 다음 말은 목구멍에 걸린 채 나오지 않았고, 태호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몇 초였는지, 하윤은 훗날에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도로를 달리던 차들의 소음도, 겨울바람의 매서움도, 모두 아득히 멀어지는 느낌이었다는 것만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들어가자, 하윤아." 그가 낮게 말했을 때, 그 목소리에는 이미 결심이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다정함과 위험함이 동시에 배어 있었고, 하윤은 그 순간 자신이 되돌릴 수 없는 문턱을 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그날 새벽, 낯선 호텔방의 차가운 시트 위에서 그녀는 태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무언가가 마침내 터져 나오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는데, 그 해방감 뒤에 반드시 뒤따르는 죄책감이라는 그림자를 그때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옅게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 방 안의 온도는 여전히 서늘했지만 두 사람의 몸 사이에는 이상하게 온기가 고여 있었고, 하윤은 그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두고 싶어 그의 팔 안으로 몸을 더 파고들었다. "너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 태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을 때, 하윤은 그 말이 경고인지 자책인지 구분할 수 없었고, 그저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를 듣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알아요." 한참 후에야 그녀가 겨우 뱉은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는데, 그 짧은 대답 속에는 이미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가 담겨 있었다. 태호는 그 대답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고, 다만 그녀의 어깨를 좀 더 세게 끌어안았을 뿐이었는데, 그 완력의 세기가 하윤에게는 언어보다 더 명확한 확인처럼 느껴졌다. *** 그 후로 두 사람의 만남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끊이지 않는 물줄기처럼 이어졌는데, 태호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고 하윤은 그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앎이 오히려 관계를 더 은밀하고 짙게 만드는 촉매가 되었다. "애들 학교 끝나는 시간에는 절대 연락 안 돼." 태호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규칙을 세웠을 때, 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규칙에 순응했는데, 그 순응이 자신을 그의 세계 안에서 정해진 자리에 밀어넣는 것임을 그때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주말에는 연락하지 마." 그가 또 한 번 선을 그었을 때도, 하윤은 아무 말 없이 그 선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 선이 명확할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규칙은 하나둘 늘어갔다. 만남의 장소는 늘 두 사람만 아는 조용한 곳이었고, 연락은 대개 짧고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며, 하윤은 그 모든 규칙을 하나씩 받아들이는 동안 자신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카페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윤은, 손에 쥔 휴대폰 화면이 다시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내렸다. [오늘 저녁 시간 돼?] 짧은 문장 하나가, 오 년 전 그날 밤의 온도를 그대로 되살려내는 듯했고,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잠시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한 번만.'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 말이 지난 오 년간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반복해온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그녀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한 번만, 이라는 말은 늘 그 다음 번을 예고하는 서곡이었고, 그 서곡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하윤은 이제 세는 것조차 그만둔 지 오래였다. 하윤은 답장을 쓰려다 멈추고, 대신 창밖의 가을 햇살이 유리창에 부딪쳐 부서지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는데, 그 빛의 파편들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미 이 관계를 끊어낼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조용히 인정하고 있었다. 카페 안을 채운 사람들의 낮은 웃음소리와 커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멀게 느껴졌고, 그 소음의 바깥에서 그녀는 오직 휴대폰 화면 위의 짧은 문장 하나에만 온 신경이 붙들려 있었다. 지난 오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밤을 이런 식으로 흘려보냈는지, 얼마나 많은 아침을 죄책감으로 시작했는지, 그 모든 시간의 무게가 지금 이 순간 다시 손끝으로 몰려드는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마음 어딘가에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결국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짧게 움직였다. [여덟 시, 그 카페에서.]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흐른 것은 죄책감이 아니라, 오히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짜릿한 긴장감이었다. 휴대폰을 가방 속에 다시 넣으며, 하윤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고, 그 낯섦 속에서 그녀는 오늘 저녁 여덟 시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오늘 저녁의 그 짧은 만남이, 지난 오 년간 애써 지켜온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리게 될 시작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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