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다정한 거짓말

3화

석 달 뒤, 초겨울의 홍대 어느 소극장 앞. 거리에는 밤공기가 서늘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간판의 불빛들이 젖은 아스팔트 위로 흐릿하게 번져 있었는데, 하윤은 회사 동료의 소개로 참석한 작은 공연 뒤풀이 자리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이민준을 처음 만났다. 민준은 그때 서른두 살, 막 자신의 작업실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가구 디자이너였는데, 투박한 손끝과는 어울리지 않게 말투가 조곤조곤했고,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딘가 순박한 온기가 배어 있어서, 처음 마주 앉았을 때부터 하윤은 이상하게도 경계심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이 원목 테이블, 제가 만든 겁니다." 그가 소극장 로비에 놓인 테이블을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자, 그 웃음의 어색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하윤은 스스로 놀랐다. "직접 만드셨어요? 손끝이 야무지시네요." 그녀가 던진 말에 민준은 귀 끝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감추려는 듯 술잔을 만지작거렸고, 그 소박한 반응이 하윤의 눈에는 오래도록 낯설게 남았는데, 그것은 태호에게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서투름이었기 때문이었다. 태호와의 만남이 언제나 은밀한 계산과 긴장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과는 달리, 민준과의 시간은 이상하게도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않은 채 가볍게 흘러갔는데, 그 가벼움이 하윤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신선한 감각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그 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창문에 이마를 대고 오래도록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몇 번의 저녁 식사를 함께했고, 민준은 매번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으며, 젓가락질을 하다가도 문득 손을 멈추고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진지함 앞에서 하윤은 자신이 감추고 있는 또 다른 삶에 대해 한 번도 캐물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민준의 작업실에는 늘 원목 냄새와 사포 가루의 흔적이 배어 있었고, 하윤은 가끔 그곳에 들러 그가 대패질을 하는 뒷모습을 지켜보곤 했는데, 그 넓지 않은 어깨와 땀에 젖은 목덜미를 바라보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이상하게도 안전한 항구처럼 느껴졌다. "주말에 뭐 했어?" 어느 저녁, 민준이 파스타를 앞에 두고 무심하게 물었을 때, 하윤은 잠시 젓가락질을 멈추었다가 이내 태연하게 대답했다. "친구 만나서 밥 먹고, 그냥 좀 쉬었어." 그 문장 속에 숨겨진 진짜 주말—태호의 차 안에서 보낸 두 시간, 그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감쌌던 순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흘리지 않았는데, 민준은 그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화제를 자연스럽게 다음 이야기로 넘겼다. 그 순간 하윤의 가슴 한켠에서 낮은 온기가 피어올랐는데, 그것은 애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안전함에서 비롯된 감정이었고, 자신의 거짓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통과되는 것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이상한 위안이었다. 그녀는 종종 그 위안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 스스로 되짚어보려 했지만, 민준의 손이 식탁 위로 건너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덮을 때마다, 그 생각은 손끝의 온도와 함께 스르르 녹아 사라지곤 했다. 연애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깊어졌고, 이듬해 봄 두 사람은 부모님들의 축복 속에서 조용히 혼인신고를 했으며, 하윤은 신혼집의 작은 서재 창가에 앉아 계약서에 도장을 찍던 그날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었는데, 창밖으로 벚꽃 잎이 흩날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문득 이것이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평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태호와의 만남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는데, 그녀는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풀이하면서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청첩장 문구를 고르는 오후에도, 웨딩드레스 피팅을 마친 저녁에도, 그녀의 휴대폰은 어김없이 태호의 이름으로 진동했다. "오늘은 안 돼요." 처음에는 그렇게 거절의 말을 앞세웠지만, 결국 그녀는 매번 약속 장소에 나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 반복 속에서 스스로를 향한 혐오와 설명할 수 없는 갈증이 동시에 자라났다. 결혼식 두 주 전, 태호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겠다며 연락을 해왔을 때, 하윤은 신부수업을 마치고 나온 늦은 오후, 그의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차 안에는 낮게 히터가 돌아가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초저녁의 푸르스름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는데, 태호는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래도록 핸들만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 결혼하는 거야." 태호가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낮게 물었을 때, 하윤은 창밖을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 "네." 그 짧은 대답 뒤에 흐른 침묵 속에서, 태호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고, 다만 그녀의 손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을 뿐이었는데, 그 손의 온도가 오랫동안 그녀의 손등에 남아 있었고,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 온기는 마치 낙인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녀는 속으로 되뇌며 걸음을 옮겼지만, 등 뒤에서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까지도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데 온 힘을 다해야 했다. 결혼식 날, 하윤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 없는 손을 대신 잡아준 삼촌의 팔에 의지해 걸어 나가며, 하객석 어딘가에 앉아 있을지도 모를 태호의 얼굴을 애써 찾지 않으려 했는데, 그 노력 자체가 이미 그녀 마음속에 그의 존재가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식장의 조명은 지나치게 밝았고, 하얀 꽃들이 통로 양쪽에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시선을 정면에만 고정한 채, 웨딩마치의 선율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민준은 주례 앞에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이 맹세를 읽어 내려갔고, 그 목소리에 실린 순수한 믿음이 하윤의 눈가를 뜨겁게 만들었는데, 그 눈물이 신랑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인지,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참회에서 나온 것인지 그녀 스스로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맹세가 끝나고 반지를 끼워주던 민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 떨림이 순전한 긴장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에, 하윤은 그 순진함 앞에서 다시 한 번 가슴 깊은 곳이 무너지는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피로연이 이어지는 동안 하객들의 축하 인사가 끊이지 않았고, 하윤은 연달아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도, 어딘가 낯선 시선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에 몇 번이나 홀 안을 둘러보았지만, 그곳에 태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난 그날 밤, 하윤의 휴대폰에는 짧은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축하한다. 행복해라.]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갔지만, 그녀는 이내 화면을 끄고 남편의 품에 다시 안기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 지었는데, 그 미소 뒤편으로 휴대폰 액정이 다시 한 번 짧게 진동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애써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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