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내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끼익, 소리를 냈다. 낡은 나무 의자였다. 나중에 이 의자도 바꿔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가,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분위기가 진지했다. 이건 단순히 학원 얘기가 아니었다.
방 안에 형광등 불빛이 뿌옇게 깔려 있었고, 창문 틈으로 초봄밤 특유의 쌀쌀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어머니 얼굴엔 낮보다 짙어진 그늘이 있었다.
"민준아."
"네."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심장이 두근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시나리오가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몇 가지 대답을 굴려봤지만 다 이상했다. "저 사실 삼십몇 년 후에서 온 어른이에요" 같은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 요즘 좀 이상해. 말투도 그렇고, 아까 아빠 증상 물어본 것도 그렇고."
어머니가 내 눈을 똑바로 봤다.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어머니는 딱 이런 눈으로 나를 봤었다.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했을 때, 내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그때마다 어머니는 이렇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어왔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학교에서 괴롭힘당하거나 그런 거?"
예상 밖의 방향이었다.
솔직히 좀 웃겼다. 지금 이 몸으로 다시 중학교 1학년을 겪고 있는 판국에 괴롭힘 같은 걸 걱정할 처지가 아닌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그래?"
말이 안 나왔다. 진짜로 말할 수 없는 이유였으니까.
어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거칠거칠한 손등, 손가락 마디마디 굳은살까지 전생에서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손톱 밑에 남은 시장 좌판의 흔적, 설거지로 벌겋게 부은 손가락 관절, 반지 낀 자리만 하얗게 벗겨진 살결까지도 똑같았다.
전생에서 이 손이 아버지 병간호로 얼마나 거칠어졌는지, 그리고 결국 얼마나 무리해서 세상을 떠났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병실 침대 옆 보조의자에서 쪽잠을 자던 어머니, 링거대를 붙잡고 걷던 아버지, 그리고 몇 년 뒤 어머니 본인이 쓰러졌던 그 병원 복도까지도.
갑자기 목이 뜨거워졌다.
"엄마."
"응."
"엄마, 아프지 마세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 소리야, 갑자기."
"그냥요. 엄마가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내가 뭘 무리해, 살림하는 게 다지."
어머니가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전생에서 아버지 병원비를 벌기 위해 어머니가 새벽시장 일을 나가고, 밤엔 부업으로 봉투를 붙이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손끝에 풀 냄새가 배어 있던 밤들, 형광등 아래서 눈을 비비며 봉투를 접던 옆모습, 그러다 결국 과로로 무너졌던 그 장면이.
이번엔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야.
속으로 다짐이 아니라 거의 선언처럼 되뇌었다.
"엄마, 저 이제부터 열심히 할 거예요."
"뭘?"
"공부도 하고, 나중에 돈도 많이 벌고. 엄마 아빠 편하게 해드릴게요."
어머니가 헛웃음을 지었다.
"애가 별걸 다 걱정하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는 거야. 넌 지금 그냥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머니 눈가에 살짝 물기가 도는 게 보였다. 열두 살짜리가 저런 말을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짐이 무거워 보이기도 했겠지.
"근데 엄마."
"응?"
"우리 집, 형편이 많이 어려운 거예요?"
어머니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냥 알고 싶어서요."
어머니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손가락으로 이불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빠 회사가 요즘 좀 어렵대. 구조조정 얘기도 나오고. 근데 그건 애들이 걱정할 일 아니야."
1995년, 아버지 회사가 구조조정.
이건 몰랐던 정보였다. 전생에서는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 나는 열두 살이었고, 어른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밥상에서 무슨 얘기가 나와도 그저 반찬 투정이나 하고 있었을 나이였다.
"회사 이름이 뭐예요?"
"동양전자. 왜, 그것도 궁금해?"
동양전자. 어렴풋이 기억나는 이름이었다. 1990년대 후반 부도난 중소 전자업체 중 하나였을 것이다. IMF 외환위기 때 많은 회사들이 그렇게 사라졌으니까.
기억을 뒤져봤지만 정확한 부도 시점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몇 년 안에 저 회사도 무너질 거라는 것.
아버지가 실직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병, 실직, 가정 형편 — 이 세 가지가 몇 년 안에 동시에 터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시간표를 그려보자. 지금 1995년 초봄. 아버지 손 떨림은 이미 시작됐고, 아마 갑상선이나 당뇨 초기 증상일 가능성이 컸다. 회사는 구조조정 얘기가 나오는 중이고, 이대로 가면 IMF가 터지는 97년 말즈음엔 완전히 정리해고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진다. 6월 29일.
나는 그날 어디에 있었는지 떠올리려 했지만, 기억이 흐릿했다. 다행히 우리 가족이 그 근처에 갈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란 게 그렇게 정확하지가 않았으니까.
어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애가 오늘 왜 이렇게 어른스러운 얘기만 해."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었다.
"엄마."
"응."
"아빠 병원 한번 데려가면 안 돼요? 그냥 건강검진이라도."
"갑자기 왜?"
"요즘 손 떠는 것도 그렇고, 물 많이 마시는 것도 좀 걸려서요."
어머니가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마치 내 얼굴 뒤에 숨겨진 뭔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너 진짜 이상하다. 애가 어떻게 그런 걸 다 신경 써."
"그냥 걱정돼서요."
"학교에서 뭐 배웠어? 보건 시간에 그런 것도 가르쳐줘?"
"…네, 뭐 그런 거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나도 내가 이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잘하는 줄 몰랐다.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알았어. 이번 주말에 병원 한번 가보자고 할게. 근데 아빠가 순순히 갈지 모르겠네. 병원 싫어하잖아."
"제가 말해볼게요."
"네가?"
"아빠는 저 말은 잘 들으시잖아요."
어머니가 피식 웃었다.
"그건 맞지."
다행이었다. 일단 첫 단추는 끼웠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려다 뒤돌아봤다.
"민준아."
"네?"
"너, 진짜 뭔 일 있는 거 아니지?"
"없어요."
"…알았어. 근데 뭔 일 있으면 꼭 엄마한테 말해."
"네."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방에서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오늘 하루 만에 알게 된 정보가 너무 많았다. 아버지의 초기 병증, 아버지 회사의 구조조정, 그리고 어머니 눈에 비친 나의 이상함까지.
머릿속에서 달력이 펼쳐졌다. 1995년, 96년, 97년. 각 연도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씩 짚어봤다. 삼풍백화점 붕괴, 그리고 그 여파로 한동안 온 나라가 안전 점검이니 뭐니 떠들썩했던 것. 이어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외환위기의 전조들, 환율이 오르고 대기업이 도산하고, 결국 IMF 구제금융까지.
1995년 서울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안에는 곧 무너질 위기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6월엔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몇 년 안에 IMF가 터지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아버지의 병이 서서히 자라날 것이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축복이 아니라 짐이었다.
내가 뭘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열두 살짜리 몸으로, 통장에 돈 한 푼 없이, 미래를 안다는 것만으로 뭘 바꿀 수 있을까.
창밖에서 늦은 밤 순찰차 사이렌 소리가 지나갔다.
삐이익.
소리가 멀어지고서야 나는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 전생의 병실 냄새를 다시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