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은이 주방 뒤로 사라지자, 도준은 잠시 숨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뒤엉켜 있었다. 짱형이 소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짱형의 딸이 매일 같은 교실에서 마주치는 다은이라는 사실. 두 개의 사실이 겹쳐지자 도준은 마치 다른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영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장난기 어렸던 표정은 사라지고, 눈빛이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손끝으로 테이블 위의 냅킨을 매만지던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 도준 씨, 부탁이 하나 있어요.
도준은 아직 정신을 다 추스르지 못한 채였다. 짱형이 소영이었고, 그 딸이 같은 반 다은이라는 사실을 소화하기도 전에, 소영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유리창에 스쳤다. 카페 안의 라디오에서는 낮게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도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 부탁이요?
— 다은이랑... 친하게 지내줄 수 있을까요.
소영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낮아졌다. 손끝으로 컵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컵 안의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테두리를 따라 원을 그리듯 매만지고 있었다.
— 다은이가 남자를 좀 많이 미워해요. 아빠가... 군에서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 뒤로 심해졌어요. 남자애들이랑은 아예 말도 안 섞으려 하고.
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짐작도 못 했던 가정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다은의 평소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교실에서 항상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모습, 누가 말을 걸어도 시선조차 주지 않던 모습. 그 뒤에 이런 사정이 있었다는 걸, 도준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그런데 왜 저한테...
— 도준 씨는 위험하지 않아 보여서요.
소영이 웃었다. 그 웃음이 왜인지 서글퍼 보였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 짱형으로 만난 시간 동안, 도준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어요. 착하고, 진지하고. 그런 사람이 다은이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요.
— 저는... 다은이랑 딱히 친하지도 않고, 그런 부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요.
— 알아요. 그래도 부탁하고 싶어요.
소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평소의 장난스러움은 사라지고, 오직 부모로서의 절박함만이 남아 있었다.
— 다은이가 계속 그렇게 혼자 담을 쌓고 있으면... 저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서요.
도준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이 상황에서 어떤 대답이 적절한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소영의 눈을 마주 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순간, 카운터 뒤쪽에서 그릇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
소영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도준도 반사적으로 그쪽을 보았다.
다은이 서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발밑에는 깨진 접시 조각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방금 대화를 다 들었다는 걸 도준은 직감했다.
— 지금... 무슨 소리야.
다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뻗었다.
— 다은아, 그게 아니라—
— 저 애한테 나 좀 봐달라고 부탁한 거야? 엄마가?
다은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분노인지 서러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은 곧 온몸으로 번지는 듯했다.
— 엄마는 항상 그래.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데려오려고 하지.
— 다은아, 오해야. 엄마는 그냥—
— 뭐가 오해야. 방금 다 들었잖아. 착하고 진지한 사람이 옆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잖아.
다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카페 안의 몇몇 손님들이 이쪽을 힐끔거렸지만, 다은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소영에게, 그리고 도준에게 번갈아 꽂혀 있었다.
— 나는 친구 같은 거 필요 없어. 특히 남자애랑은.
— 다은아...
소영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갈라졌다. 손을 뻗어 다은의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다은은 그 손을 뿌리쳤다.
— 만지지 마.
다은은 소영의 말을 자르며 성큼 도준 앞으로 걸어왔다. 도준은 갑작스러운 접근에 몸이 뒤로 젖혀졌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짧은 마찰음을 냈다.
다은의 눈빛이 흔들리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굳어졌다. 눈동자 안쪽에서 무언가가 결심으로 굳어지는 것이, 도준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 좋아. 그럼 나도 이렇게 할래.
다은은 도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 눈빛에는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 나랑 사귀자.
카페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창가의 커플도, 노트북 앞의 손님도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는 숨을 멈춘 듯 정지해 있었고, 누군가는 옆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소영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이 힘없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도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른 느낌이었다. 방금 들은 말이 실제로 들은 말인지, 아니면 자신이 잘못 들은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뭐라고...?'
도준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다은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도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은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 안쪽 어딘가에는, 도준이 처음 보는 흔들림이 있었다. 마치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놀라고 있는 듯한, 그런 미세한 균열이었다.
— 그럼 엄마도 더 이상 이상한 부탁 안 하겠지.
다은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하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감추려는 듯, 다은은 팔을 몸에 바짝 붙였다.
도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방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기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소영은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딸을 바라보고 있었고, 다은은 그런 엄마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도준만을 쏘아보고 있었다.
카페 안의 정적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컵에서 얼음이 녹아 부딪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도준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의 시선 사이에 갇혀 있었다.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어떤 말도 지금 이 상황에 맞아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다은의 눈빛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되돌릴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듯이.